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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19일 일요일

온 워드 : 단 하루의 기적 감상

 지나친 미국식 레퍼토리에 번지수 잘못 찾은 변화구가 이상하게 꽂힌 영화.

걍 전체적으로 다 별로였다.


일단 기반 설정인 마법을 잊은 세상이라는 것은 판타지 인물에 시대적 배경을 현대 사회로 스킨을 씌워 뭔가 색다름을 보여주려 한듯 하다. 그런데 실제로 마법이 쓰기 번거롭고 과학이 사용하기 쉽다 하여 정말로 마법을 안 쓰게 되고 잊혀질까? 라는 가정의 뒷받침이 미흡하다. 과학은 어디까지나 편의적인 요소일 뿐, 마법에 비하면 그 힘은 단순하다. 작중에 보여지는 공중 부양 마법이나 위장 마법, 크기 변화 마법만 해도 이건 단순히 과학의 힘으로는 재현이 어렵다. 과학의 힘으로 능히 쉽고 편하고 간단하게 재현이 가능해야 마법이 외면 당할수 있는데 과학이 이룰수 없는 부분을 마법이 가능하다면 어째서 마법이 사라진다는것인지 그 논리적인 타당성이 전혀 없다.

요정의 날개며 켄타로스의 달리기만 해도 쓰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는것도 어설픈데 날지 않다가 날기 시작한 요정들은 언제 그랬냐는듯이 계속 날아다니고 있다. 필요가 없어서, 왜 날아야 하는지 몰라서 안 한거 치고는 날기 시작하니 그냥 계속 날아다닌다. 능히 해낼수 있는 능력을 잃은것에 대한 합당한 설명이 안 된다. 켄타로스도 마찬가지, 아무리 자동차를 타고 다닌다지만 그쪽 동네는 올림픽도 없고 시합도 없나? 달리기는 생물의 다양한 행동들 중에서도 가장 근간을 이루는 움직임인데 켄타로스가 빠르게 달리는게 환상처럼 되어 버린것 역시 타당한 설명이 없다.

이 영화는 그렇게 현대적인 공간속에서 신비로움을 부여하려 하다보니 마법을 잃고 종족들이 본래 성질을 잃은 듯한 설정을 잡으며 영화의 다른 주인공인 발리가 그런 과거의 역사를 게임화한 테이블 롤플레잉 게임 매니아로 되어 있다. 하지만 이 역시도 기본 무대인 현대화 된 도시를 벗어나지 못 하기에 신비로움을 제대로 끌어내지 못 하고 있다.


게다가 이 영화에서 긴장을 끌어올리기 위한 장치인 오래전 돌아가신 아버지를 단 하루만 불러낼수 있는 마법이 피닉스 젬의 문제로 인해 하반신만 불러내어 24시간 내에 다른 피닉스젬을 찾지 않으면 마법은 사라지고 두번 다시 쓸수 없다는 작위적인 설정이 너무나도 지나치게 스토리를 억지춘향으로 이끌어 나간다. 24시간의 제한시간이 점점 줄어들면서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게 애타게 만드는건 유효한 방식이나 이를 유도하는 방법이 글러먹어서 모험이라는 이름으로 뺑뺑이를 돌리며 시간을 잡아 먹고는 짜잔 돌고 돌다 보니 우리 마을 안에 있었네요 라고 하니 긴장의 끈을 잡고 있던 관객에게 통수를 선사한다. 


그리고 이안과 발리. 극을 이끄는 이 두 주인공은 일단 지나칠 정도로 전형적이다. 어떻게?

이안은 소심하여 잘 표현하지 못 하고 항상 재수가 없고 잘 하는게 없는 불행하고 재수없는 소시민이다.

반면 발리는 눈치없고 계획없고 덜렁덜렁하고 자신의 주 관심사 외에는 눈을 돌리지 않는 마이페이스적인 사고뭉치 캐릭터다.

이런 둘의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것은 보통 발리가 끌어나가고 이안이 쫓아가다가 반전이 생기는 편일텐데 이 이야기는 변화구를 이상하게 던지다 보니 이안이 끌어나가고 발리가 쫓아간다. 마법을 사용 가능한 이안이 없으면 극 중 이야기가 진행이 안 되는 부분이 너무 많아서 이안이 주도적으로 움직이지 않을수가 없게 만든다.

그렇게 성장형 주인공인 이안은 아버지를 불러내기 위한 모험을 통해서 목표로 하던 것들을 성취하는 성장을 이루긴 하지만 정작 아버지를 만나고 싶다는 소원은 이루지 못 한다. 가족애는 미국 영화에서 지겹도록 찾아 볼수 있는 흔한 레퍼토리이기에 어설픈 결말로는 감동을 주기 힘들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 변화구를 이상하게 주다보니 정작 만나야 하는 사람이 만나지 못 하게 만들어 시원하게 해소되지 못 하는 찜찜한 결말을 낸다.

다른 주인공인 발리는 이안에 비하면 성장을 이루지 못 하는데 작품의 기반 설정인 마법을 잊은 세계에서 역사도 같이 잊어버렸기에 이안이 마법을 쓸수 있게 되고 역사속 모험을 재현하며 그가 철거를 막으려던 행동이 의미가 있는 것이 되었기에 그는 구제불능이라는 세간의 인식을 스스로 바꿔냈다기 보다는 작품의 흐름에 떠밀려서 평가가 상승한 구조다. 이야기 마지막에 등장한 저주를 상대 할 힘이 없는 발리는 아버지와 짧은 재회를 떠넘기듯이 받을수 밖에 없다. 본래 다른 창작물 같았으면 이안이 아버지를 만나고 발리가 적과 싸웠을텐데 그 전형적인 형식에서 탈피하고자 준 변화구는 결국 스트라이크존에 제대로 꽂히지 못 하게 만든다.

볼 넷이면 주자를 내보내듯 컨텐츠에서 볼 넷이면 관객을 내보낼텐데 이 영화의 변화구는 계속 엉뚱한 곳으로 꽂혀서 하마터면 관객을 내보낼뻔 한다. 그나마 다행인건 이런 어설픈 변화구들 속에서 이안은 바라던 것을 이루지는 못 했지만 성장을 했고, 발리는 구제불능이라고 여겨지는 문제점인 무책임한 행동을 고치지는 못 했지만 자신의 애마인 자동차 귀네비어를 희생시킬 정도로 아버지를 만나려는 진심을 보여주고 동생과의 관계를 일방적으로 파탄내는 글러먹은 형은 아니었기에 이 둘의 관계는 수많은 변화구 속에서 기본을 지켜주고 있다.


그렇지만 솔직히 영상미도 딸리고 독특한 맛도 딸려서 픽사 애니메이션으로서는 그저 그렇다. 픽사의 영화들이 대체로 현실기반에 허구를 가미한 것에 비해 이 영화는 허구에 현실을 대입하려 하다보니 신비로움이 퇴색되고 독창적인 구성도 잃어 전형적으로 미국스러운 점만 남겼다.

2021년 12월 18일 토요일

픽사의 루카 감상

 생각외로 많이 좋았던 영화.

어인의 그래픽이 좀 친근하게 느껴지지 않다보니 그 점에서 조금 아쉬웠다. 그래서 인간 모습으로 활동하는 대회 준비중인 부분에서는 부담없이 볼수 있고 다시 어인 모숩으로 바뀌는 부분에서는 부담스럽고 그렇다.

더빙은 일본어 더빙이 가장 부드럽게 와 닿았는데 일본어 더빙 버전이 여러 부분에서 가장 무난했다. 한국어 더빙은 초반이 좀 적응하기 힘들었는데 어린 어인역의 루카와 알베르토, 특히 알베르토가 대사에 쫓기듯이 말하느라 자연스럽지 못 해 너무 연기티가 났다. 루카는 톤이 너무 튀고. 여자아이인 줄리아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국내 성우들 연기 실력이야 확실하니 그건 문제가 없는데 영화의 메인 주인공들이 아이들이다 보니 이야기 대부분의 내용이 이쪽 목소리와 연기에 의존해야 해서 안정적이지 않은게 아쉽다. 이 주역 세명만 빼면 오히려 그 외 캐릭터들 더빙은 일본어보다 한국어 더빙이 더 안정적이고 좋다.


영화의 이야기는 물 위 세계를 동경하는 루카와 알베르토의 우연한 만남으로 시작된다. 하루하루 지루하고 뻔하고 반복적인 일상속에서 알베르토와의 만남은 루카의 삶을 바꿔 놓는다. 온갖 종류의 지상의 물건들 속에서 두 아이의 마음을 끈 것은 스쿠터인 베스파. 둘은 베스파를 직접 만들면서도 내내 실패하지만 그럼에도 베스파를 갖고 싶다는 꿈을 잃지 않는다. 그러나 알베르토와의 시간을 보내는 바람에 부모에게 들키게 되었고 루카가 위험에 처하지 않게 하기 위해 심해로 보내려고 하는 것을 루카는 거부하고 알베르토의 제안으로 인간의 마을로 숨어든다. 인간의 마을에서 베스파를 본 둘은 대회 상금으로 베스파를 살수도 있다는 말에 대회에 출전하기 위하여 줄리아와 한팀을 이루게 된다.


루카의 이야기는 심플하다. 참가를 위해 돈을 마련하고 대회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사고가 발생하고 대회 당일 갈라진 관계속에서 고군분투하다가 관계를 봉합하고 노력끝에 빛을 본다.

심플하고 뻔한 이야기를 잘 살려낸 부분은 알베르토의 캐릭터성이다. 소극적인 루카는 알베르토와의 만남을 통해 작중 내내 알베르토에게 끌려다니지만 점차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루카는 도전을 통해 조금씩 성장을 하고 적극적으로 변화한다. 그러나 이 변화는 알베르토에게 위기를 가져오는데 가족인 아버지가 떠나고 오랜 시간동안 혼자 지내던 알베르토에게 찾아온 루카는 가족,동생,친구의 관계를 가지게 되면서 알베르토는 멘토인 리더의 롤을 자처한다. 그러나 알베르토는 줄리아의 만남 이후로 조금씩 자신에게서 떨어져 나가고 부정당하는 것을 민감하게 여긴다. 결국 루카와 알베르토와의 관계는 갈라지고 이 관계는 대회 당일까지도 회복이 되지 않는다.

여기서 캐릭터성이 좋다고 느낀 것은 정신적으로 성장하는 부분이다.

알베르토는 리더의 롤을 고수하기 위해 루카가 더는 관계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않길 바란다. 루카가 없으면 알베르토는 다시 혼자가 되고 리더의 롤도 의미가 없게 되어 버린다. 그러나 그 행동은 결국 루카를 억압하던 부모와 같은 행동이 되어 버린다. 루카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고 공통의 목표를 강요하게 된다.

루카는 그런 알베르토를 외면하고 타인처럼 선을 그으면서 알베르토에게 다시금 혼자 남겨지는 상실감을 안겨주게 된다. 그리고 루카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알베르토의 꿈을 이루어주기 위해 대회에 참가한다.

그리고 루카가 위기에 처한 순간 알베르토는 루카를 돕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다. 루카를 곤란하게 만들고 루카에게 외면당하게 만든 행동은 이제는 루카를 지키기 위한 것이 된다. 그런 알베르토의 행동을 통해 루카 역시 알베르토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극복하고 성장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꿈을 위해 달려준 루카에게 알베르토는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대신 루카의 꿈을 이뤄준다.


이 영화의 제목은 루카이지만 이 영화의 큰 줄기를 이끌어나가는 것은 알베르토다.

알베르토와의 만남을 통해 루카는 변화했고, 공통의 꿈을 가지고, 인간의 마을에 들어간다. 그리고 그런 루카에게 알베르토는 복잡한 마음이 긴장감을 조성하고 시련을 주며, 루카와 알베르토 둘이 정신적으로 성장하는 계기를 만든다. 사건의 발단과 위기의 고조, 긴장, 해소, 승화,성장을 이 알베르토라는 캐릭터가 끌어내고 있다. 그래서 단점이 생기는데 그 외 다른 캐릭터가 해야 할 역할이 상당히 축소되어 있다는 점이다.

줄리아는 루카에게 새로운 목표를 제시하며 알베르토와 갈라지게 만드는 계기가 되지만 실상 줄리아가 가진 문제는 그리 빛을 못 본다. 줄리아가 정신적으로 성장하지도 않고, 결정적인 해결책에 도움이 그리 안 된다. 분명 영화의 이야기를 대회까지 끌어올리는데는 줄리아의 도움이 크긴 했지만 그 기여도에 비하면 줄리아 자체의 이야기는 매끄럽게 풀리지 않는다.

또한 루카의 부모 역시 루카와 떨어지게 된 문제를 집중적으로 풀지도 않는다. 종종 모습을 보여서 도망쳐 나온 루카에게 긴장감을 부여하긴 하지만 정작 루카가 도망쳐 나오게 된 문제를 마지막에 몰아서 대충 해결하기에 문제의 발단 치고는 마무리가 허술하며 빈약하다.

바다괴물이라는 공포 역시 마을사람들이 가지는 감정에 비해 너무 쉽게 해결이 되어 버리는데 이야기의 대부분은 루카와 알베르토의 관계에 집중되어 그 외 부분들은 마무리에서 몰아서 대충 해결이란 경향이 강하다.


그럼에도 영화는 재미있고 캐릭터가 성장하는 것이 기분좋게 와 닿는다.

2021년 12월 16일 목요일

픽사의 소울 감상

별로였다.

영화 소개에선 행복이 어떻고 인생을 돌아보고 나를 나로 만드는건 무엇인가 그런 말이 있었는데 그런것 치고는 별 내용이 없다.

영화는 조 가드너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비정규직 음악강사로 일하는 조 가드너에게 두가지 사건이 벌어진다. 하나는 정규 강사가 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재즈 밴드의 임시 연주자가 되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조 가드너(이하 가드너)는 정규 강사가 된 것을 달가워 하지 않으며 오히려 임시 연주자가 되는 기회를 얻은 것에 기뻐한다. 임시 연주자의 기회를 얻은 것에 기뻐하며 촐싹거리며 부주의하게 걷던 그는 맨홀에 빠져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된다.

현실의 저편. 삶과 죽음. 재생성의 영역에서 조 가드너는 드디어 재즈 연주자가 되는 기회를 얻었는데 죽게 된는 것을 분통해하며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다시 자신의 몸으로 돌아가려 안간힘을 쓰는 그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영혼의 멘토가 되는 기회가 주어지고 가드너는 영혼의 통행증이 완성되는 그 때 통행증을 훔쳐서 다시 살아날 계획을 꾸민다.

그러나 가드너의 멘티. 영혼 22는 오랜 시간동안 태어나는 것을 거부하는 문제아 영혼으로 체험의 전당에서의 그 어떤 경험도 열정을 불러 일으키지 못 한다. 결국 22의 통행증이 완성되지 않는 이유로 다른 존재를 찾아 병실에 입원한 자신의 몸을 찾으러 가며 자신의 몸을 발견했지만 도와주는 사람의 충고를 무시하고 난리를 치는 바람에 22가 함께 끌려가 부활하고 만다. 22는 가드너의 몸으로, 가드너는 곁에 있던 고양이의 몸으로.

일단 스포일러를 너무 많이 하면 안 되니까 스토리에 대해서는 여기까지 하고 일단 이 영화가 별로인 점에 대해 이야기 한다.

첫번째로 안 좋은 점은 주인공 설정이다.

주인공 조 가드너는 간단하게 말해 자기중심적,이기주의적인 인물이다. 단순히 선과 악 이분법적으로 나눌수 있을 건 아니지만 조 가드너는 주변에 위험한 상황이 벌어져도 신경쓰지 않고 자신의 기분따라 움직인 바람에 부주의하게 맨홀에 빠져 버렸고, 그 결과 죽음을 거부하고 난동을 부리며, 심지어는 지구에서 태어나기 위해 준비중인 영혼의 통행증을 훔칠 생각을 하며 자신의 잘못으로 몸에 들어가 버린 22의 기분은 고려하지 않은채 오로지 자신의 몸으로 돌아갈 생각만 한다.

대체로 이야기의 주인공은 선한 편인데 이유는 공감대의 문제이다. 주인공에게 몰입하게 만드는 공감대는 악보다는 선한 인간에게 열려있기 때문이다. 설령 주인공이 잘못을 저지르고 문제를 발생시켜도 주인공이 선하다면 문제를 악화시키기보다는 풀어나가는데 집중 할 수 있으며 주인공이 맞이하게 되는 결말이 더욱 의미가 있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의 주인공 조 가드너는 선하지 않다. 아직 어린 연령의 주인공이라면 최소한 미숙함을 이유로 들겠지만 가드너는 성인이다. 그리고 임시 강사라고는 하지만 학생들을 가르치는 입장이고. 그런데 그런 그는 매우 자기중심적이며 주변에 관심이 없다. 거기까지면 그나마 제대로 된 성인이 못 되었다고 치겠으나 자기가 부활하겠다고 통행증을 훔칠 생각까지 한다. 영혼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통행증이 필요하며 통행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열정이 충족되어야 완성이 되는데 열정을 갖게 된 영혼에게서 통행증을 뺐는다는건 그 영혼의 열정을 무시하고 기회를 뺐는 행위나 다름없다. 그러나 이 행위에 대해서 가드너는 일말의 죄책감조차 느끼지 않는다. 심지어 22의 통행증이 완성되어도 그것이 자기 덕분이라고 할 뿐 22에게 아무런 긍정적인 말을 건네주지 않는다.

따라서 주인공에게 몰입하게 만드는 공감대 영역이 닫히게 만든다. 아무리 그래도 나는 저런 행동은 하지 않을거야 라고 생각한다면 자연스레 가드너의 행동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게 되고 그와는 정신적 공감을 이룰 수 없게 된다. 정작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열정을 전달하려면 무엇보다도 공감이 중요한데도 말이다.

다른 주인공인 22도 딱히 잘 만들어진 주인공이 아니다. 아주 오랜시간 동안 태어나는 것을 거부하며 영혼인채로 살아가는 22는 지구에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 한다. 불을 크게 만들거나 도서관에서 쉿하며 주의를 주는데는 흥미를 느끼는 것을 보면 상당히 공격적이거나 비판적인 성향에 관심을 가지는 것을 알수 있다. 또한.  숱하게 많은 멘토를 거치면서 그들을 화나게 만들 정도로 꼬인 성격이란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성격은 가드너의 몸에 들어간 뒤로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람들과 평범하게 대화를 하며 세상 모든 것들을 즐겁게 받아들인다. 오히려 자기중심적인 가드너보다도 주변과 소통을 잘 할 정도다.

그런 22의 문제는 허술함에 있다. 첫째로는 어째서 오랜 시간동안 태어나는 것을 거부했는가에 대한 납득할만한 이유를 보이지 않는다. 냄새,맛,감각이 결여되어 있다고는 해도 그것만으로는 22가 흥미를 느끼지 못 한다는 것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 한다. 그저 모든것이 시시하다 라는 것만으로는 타당성이 없는데다 22가 모든 것을 싫어하는건 아니라서 영혼세계에 있고 싶고 지구엔 가기 싫다 인데 이 또한 타당하게 설명을 하지 않는다. 실질적인 나이로 따지면 조 가드너보다 22의 나이가 많을텐데 가드너와 22의 관계는 보이는 것처럼 성인과 아이처럼 구성된다. 그러나 가드너의 몸을 통해서 보여지는 모습은 정반대인데 가드너는 성인의 몸으로 어린아이같이 자기중심적인 행동만 한다. 어린시절 들었던 재즈에 취해 오로지 그 순간의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 한다. 반면 22는 가드너의 몸을 통해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소통한다. 지구의 삶에 익숙하지 않을 뿐이지 가드너의 몸에 들어간 22는 가드너보다도 더욱 충실하게 주변 사람들과 소통한다. 아이같은 정신의 어른의 움직임, 어른같은 정신의 아이같은 움직임. 그렇게 둘은 차이를 보이지만 문제는 이 둘을 충분히 받아들이게끔 캐릭터가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캐릭터를 이해 할수 있는 사건을 배분하고 서로의 관계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미흡하다.

둘째로 안 좋은 점은 열정,목적과 같이 모호한 관념에 매달리는 부분이다.

통행증을 만들기 위해서는 열정이 필요한데 22는 그 목적을 받아들이지 못 한다. 통행증을 굳이 만들어야 하나? 내가 왜 태어나야 하지? 라는 것처럼 말이다. 반면 가드너는 오로지 열정을 맹목적으로 숭상한다. 자신이 바랬던 꿈,목표에 극도로 집착하며 악한 행동도 서슴치 않는다.

그런데 이 두가지는 감정이라는 걸 다룬 인사이드아웃보다도 더욱 더 자기중심적이고 모호하다는 점이다. 감정은 간단하면서도 자기중심적이다. 희노애락에 인사이드아웃은 여기에서 몇가지 감정을 더 넣긴 했는데 이 감정은 우리 일상에서 자연스레 발현이 되기에 매우 쉽게 받아들여질수가 있다.

그런데 열정과 목적은? 열정은 지극히 주관적인 부분이기에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온도차가 있다. 작중에 나온 재즈만 해도 그렇다. 재즈를 좋아하긴 하지만 듣기만 하는 사람, 재즈를 연주하고 싶은 사람, 유명한 프로 연주자가 되고 싶은 사람 등 사람마다 좋아하는 것에 열정을 바치는 정도가 다르다. 반면 목적은? 이해하기 쉬울듯 하나 이 역시도 지극히 주관적이다. 조 가드너는 목적인 프로 연주자가 되기 위해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타인의 기회를 빼앗으려는 것도 서슴치 않는다. 설령 목적이 같더라도 해결하려는 바가 다를수 있듯이 가드너의 목적은 이해하긴 쉬워도 방식은 공감하긴 어렵다. 이처럼 주관적인 부분에서 뗄레야 뗄수 없는게 열정과 목적이고 열정이 목적이 될수도 목적이 열정이 될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를 잘 숨겨서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해야 주관적인 감정에 접근하기 좋은데 대놓고 열정이 필요하고 태어나려는 목적이 어쩌고 이러면서 주관을 밖으로 꺼내버리고 만다. 이렇게 공개된 주관성은 객관성에 침해당하기 쉽다. 음악을 듣거나 음식을 먹으며 행복하다는 감정을 보이는 것과 자신이 느낀 감정을 설명하려는 것의 차이인 것이다. 보통은 행복한 표정을 짓고 기뻐하고 웃는 모습을 하나하나 신경쓰지 않는다. 하지만 이 감정을 설명 할 경우 그것은 판단의 기준이 되어버린다. 음식이 맛있다고 설명을 하는 순간 그게 그렇게 맛있나? 라고 의문을 가지는 것처럼 말이다.

이야기로 돌아와서 열정과 목적은 주관성에 가까운데 문제는 이걸 밖으로 드러내고 이게 필요하다고 언급을 하고는 이 개념에 계속 매달리고 있다. 차라리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이게 내 목적이었어요 라거나 내 삶의 열정을 다시 찾았어 정도로 툭 던지고 가면 아 그랬구나 라고 받아들였을 것을 작중 내내 열정과 목적에 속박되는 바람에 이 두 개념은 언급되는 횟수 만큼 무거우면서도 공감하기 어렵게 만든다.

모호한 관념,개념은 그것을 설명하기 보다는 그저 보여주는게 좋은데 말이다.

셋째로 마무리. 두 캐릭터가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이 별로였다.

가드너는 결국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지만 그것을 성취한 순간 이게 정말 내가 원한것이었나 라는 의문을 가지며 실망하게 된다. 그런 그는 22가 남기고 간 것을 보며 22가 느꼈던 감정을 떠올리고 22를 찾고 문제를 해결하고 22는 통행증을 되찾는다.

문제는 그래서 어쨌냐는거다. 결말에서 보여지는 모습은 모호함 밖에 없다. 22는 어떻게 되었고 가드너는 강사와 연주자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했는지 뭘 깨달았는지 보여주지 않고 모호하게 관객의 상상에 맡기며 끝내버린다. 열정과 목적을 그토록 언급해 놓고는 결말을 모호하게 만드니 어이가 없다. 열정과 목적을 부정하고 일상의 행복을 강조하기 위해 계속 열정과 목적을 언급한것과 마찬가지인데 이걸 자연스럽게 깨닫는 것이 아니라 열정과 목적을 찾는 과정속에서 겪는 부정적인 일을 통해서 일상의 행복만 남겨 강조를 시킨거나 다름없다. 마치 성공을 쫓은 주인공이 허무함을 느끼고 잃어버린 것에 대한 소중함을 깨닫는 그저 그런 스토리처럼 작위적인 구성을 취하고 있다. 성공과 행복, 달성에 대한 성취감, 가족애 등과 같은 것들은 작품마다 강조되어지는 부분이 다르다. 어떤 작품은 성공을 해서 행복해지고 어떤 작품은 성공보다는 가족애를 중시하고 각기 다르긴 하지만 소울에서 주인공 조 가드너는 그토록 바래왔던 일을 단 한번 성취 했을 뿐인데 허무함을 느낀다. 허무함을 느끼게 되는 타당한 과정이 결여된채로 이게 내가 바랬던 일인가 라며 의문을 갖는데 이는 캐릭터와 이야기를 허술하게 만든다. 행복이 중요하다는 결론에만 매몰되어 왜 그런지 과정을 날려버리고 결론도 대충 알아서 생각하길 바라는것 마냥 날려버린다.

심하게 말하자면 이건 단순한 겁쟁이의 행복론이다. 꿈을 이루어도 행복하지 못 하게 만든다면 갈구하는 것, 노력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그렇게 달려온 과정마저 바보취급을 해 버리니 조 가드너라는 캐릭터에게 연결될 공감대 영역이 줄어들고 만다. 그토록 바래왔던 것을 이루었는데 그렇게 쉽게 실망한다고? 심지어 목적에 매몰되어 통행증마저 빼앗으려던 이기적인 녀석이?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전개 때문에 조 가드너가 가진 열정마저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벌였는지 이해하기 힘든 결과를 만들고 만다.

차라리 과정을 조질거면 결말이라도 깔끔하게 내던가. 결말도 이 모양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