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16일 목요일

픽사의 소울 감상

별로였다.

영화 소개에선 행복이 어떻고 인생을 돌아보고 나를 나로 만드는건 무엇인가 그런 말이 있었는데 그런것 치고는 별 내용이 없다.

영화는 조 가드너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비정규직 음악강사로 일하는 조 가드너에게 두가지 사건이 벌어진다. 하나는 정규 강사가 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재즈 밴드의 임시 연주자가 되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조 가드너(이하 가드너)는 정규 강사가 된 것을 달가워 하지 않으며 오히려 임시 연주자가 되는 기회를 얻은 것에 기뻐한다. 임시 연주자의 기회를 얻은 것에 기뻐하며 촐싹거리며 부주의하게 걷던 그는 맨홀에 빠져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된다.

현실의 저편. 삶과 죽음. 재생성의 영역에서 조 가드너는 드디어 재즈 연주자가 되는 기회를 얻었는데 죽게 된는 것을 분통해하며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다시 자신의 몸으로 돌아가려 안간힘을 쓰는 그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영혼의 멘토가 되는 기회가 주어지고 가드너는 영혼의 통행증이 완성되는 그 때 통행증을 훔쳐서 다시 살아날 계획을 꾸민다.

그러나 가드너의 멘티. 영혼 22는 오랜 시간동안 태어나는 것을 거부하는 문제아 영혼으로 체험의 전당에서의 그 어떤 경험도 열정을 불러 일으키지 못 한다. 결국 22의 통행증이 완성되지 않는 이유로 다른 존재를 찾아 병실에 입원한 자신의 몸을 찾으러 가며 자신의 몸을 발견했지만 도와주는 사람의 충고를 무시하고 난리를 치는 바람에 22가 함께 끌려가 부활하고 만다. 22는 가드너의 몸으로, 가드너는 곁에 있던 고양이의 몸으로.

일단 스포일러를 너무 많이 하면 안 되니까 스토리에 대해서는 여기까지 하고 일단 이 영화가 별로인 점에 대해 이야기 한다.

첫번째로 안 좋은 점은 주인공 설정이다.

주인공 조 가드너는 간단하게 말해 자기중심적,이기주의적인 인물이다. 단순히 선과 악 이분법적으로 나눌수 있을 건 아니지만 조 가드너는 주변에 위험한 상황이 벌어져도 신경쓰지 않고 자신의 기분따라 움직인 바람에 부주의하게 맨홀에 빠져 버렸고, 그 결과 죽음을 거부하고 난동을 부리며, 심지어는 지구에서 태어나기 위해 준비중인 영혼의 통행증을 훔칠 생각을 하며 자신의 잘못으로 몸에 들어가 버린 22의 기분은 고려하지 않은채 오로지 자신의 몸으로 돌아갈 생각만 한다.

대체로 이야기의 주인공은 선한 편인데 이유는 공감대의 문제이다. 주인공에게 몰입하게 만드는 공감대는 악보다는 선한 인간에게 열려있기 때문이다. 설령 주인공이 잘못을 저지르고 문제를 발생시켜도 주인공이 선하다면 문제를 악화시키기보다는 풀어나가는데 집중 할 수 있으며 주인공이 맞이하게 되는 결말이 더욱 의미가 있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의 주인공 조 가드너는 선하지 않다. 아직 어린 연령의 주인공이라면 최소한 미숙함을 이유로 들겠지만 가드너는 성인이다. 그리고 임시 강사라고는 하지만 학생들을 가르치는 입장이고. 그런데 그런 그는 매우 자기중심적이며 주변에 관심이 없다. 거기까지면 그나마 제대로 된 성인이 못 되었다고 치겠으나 자기가 부활하겠다고 통행증을 훔칠 생각까지 한다. 영혼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통행증이 필요하며 통행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열정이 충족되어야 완성이 되는데 열정을 갖게 된 영혼에게서 통행증을 뺐는다는건 그 영혼의 열정을 무시하고 기회를 뺐는 행위나 다름없다. 그러나 이 행위에 대해서 가드너는 일말의 죄책감조차 느끼지 않는다. 심지어 22의 통행증이 완성되어도 그것이 자기 덕분이라고 할 뿐 22에게 아무런 긍정적인 말을 건네주지 않는다.

따라서 주인공에게 몰입하게 만드는 공감대 영역이 닫히게 만든다. 아무리 그래도 나는 저런 행동은 하지 않을거야 라고 생각한다면 자연스레 가드너의 행동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게 되고 그와는 정신적 공감을 이룰 수 없게 된다. 정작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열정을 전달하려면 무엇보다도 공감이 중요한데도 말이다.

다른 주인공인 22도 딱히 잘 만들어진 주인공이 아니다. 아주 오랜시간 동안 태어나는 것을 거부하며 영혼인채로 살아가는 22는 지구에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 한다. 불을 크게 만들거나 도서관에서 쉿하며 주의를 주는데는 흥미를 느끼는 것을 보면 상당히 공격적이거나 비판적인 성향에 관심을 가지는 것을 알수 있다. 또한.  숱하게 많은 멘토를 거치면서 그들을 화나게 만들 정도로 꼬인 성격이란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성격은 가드너의 몸에 들어간 뒤로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람들과 평범하게 대화를 하며 세상 모든 것들을 즐겁게 받아들인다. 오히려 자기중심적인 가드너보다도 주변과 소통을 잘 할 정도다.

그런 22의 문제는 허술함에 있다. 첫째로는 어째서 오랜 시간동안 태어나는 것을 거부했는가에 대한 납득할만한 이유를 보이지 않는다. 냄새,맛,감각이 결여되어 있다고는 해도 그것만으로는 22가 흥미를 느끼지 못 한다는 것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 한다. 그저 모든것이 시시하다 라는 것만으로는 타당성이 없는데다 22가 모든 것을 싫어하는건 아니라서 영혼세계에 있고 싶고 지구엔 가기 싫다 인데 이 또한 타당하게 설명을 하지 않는다. 실질적인 나이로 따지면 조 가드너보다 22의 나이가 많을텐데 가드너와 22의 관계는 보이는 것처럼 성인과 아이처럼 구성된다. 그러나 가드너의 몸을 통해서 보여지는 모습은 정반대인데 가드너는 성인의 몸으로 어린아이같이 자기중심적인 행동만 한다. 어린시절 들었던 재즈에 취해 오로지 그 순간의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 한다. 반면 22는 가드너의 몸을 통해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소통한다. 지구의 삶에 익숙하지 않을 뿐이지 가드너의 몸에 들어간 22는 가드너보다도 더욱 충실하게 주변 사람들과 소통한다. 아이같은 정신의 어른의 움직임, 어른같은 정신의 아이같은 움직임. 그렇게 둘은 차이를 보이지만 문제는 이 둘을 충분히 받아들이게끔 캐릭터가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캐릭터를 이해 할수 있는 사건을 배분하고 서로의 관계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미흡하다.

둘째로 안 좋은 점은 열정,목적과 같이 모호한 관념에 매달리는 부분이다.

통행증을 만들기 위해서는 열정이 필요한데 22는 그 목적을 받아들이지 못 한다. 통행증을 굳이 만들어야 하나? 내가 왜 태어나야 하지? 라는 것처럼 말이다. 반면 가드너는 오로지 열정을 맹목적으로 숭상한다. 자신이 바랬던 꿈,목표에 극도로 집착하며 악한 행동도 서슴치 않는다.

그런데 이 두가지는 감정이라는 걸 다룬 인사이드아웃보다도 더욱 더 자기중심적이고 모호하다는 점이다. 감정은 간단하면서도 자기중심적이다. 희노애락에 인사이드아웃은 여기에서 몇가지 감정을 더 넣긴 했는데 이 감정은 우리 일상에서 자연스레 발현이 되기에 매우 쉽게 받아들여질수가 있다.

그런데 열정과 목적은? 열정은 지극히 주관적인 부분이기에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온도차가 있다. 작중에 나온 재즈만 해도 그렇다. 재즈를 좋아하긴 하지만 듣기만 하는 사람, 재즈를 연주하고 싶은 사람, 유명한 프로 연주자가 되고 싶은 사람 등 사람마다 좋아하는 것에 열정을 바치는 정도가 다르다. 반면 목적은? 이해하기 쉬울듯 하나 이 역시도 지극히 주관적이다. 조 가드너는 목적인 프로 연주자가 되기 위해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타인의 기회를 빼앗으려는 것도 서슴치 않는다. 설령 목적이 같더라도 해결하려는 바가 다를수 있듯이 가드너의 목적은 이해하긴 쉬워도 방식은 공감하긴 어렵다. 이처럼 주관적인 부분에서 뗄레야 뗄수 없는게 열정과 목적이고 열정이 목적이 될수도 목적이 열정이 될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를 잘 숨겨서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해야 주관적인 감정에 접근하기 좋은데 대놓고 열정이 필요하고 태어나려는 목적이 어쩌고 이러면서 주관을 밖으로 꺼내버리고 만다. 이렇게 공개된 주관성은 객관성에 침해당하기 쉽다. 음악을 듣거나 음식을 먹으며 행복하다는 감정을 보이는 것과 자신이 느낀 감정을 설명하려는 것의 차이인 것이다. 보통은 행복한 표정을 짓고 기뻐하고 웃는 모습을 하나하나 신경쓰지 않는다. 하지만 이 감정을 설명 할 경우 그것은 판단의 기준이 되어버린다. 음식이 맛있다고 설명을 하는 순간 그게 그렇게 맛있나? 라고 의문을 가지는 것처럼 말이다.

이야기로 돌아와서 열정과 목적은 주관성에 가까운데 문제는 이걸 밖으로 드러내고 이게 필요하다고 언급을 하고는 이 개념에 계속 매달리고 있다. 차라리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이게 내 목적이었어요 라거나 내 삶의 열정을 다시 찾았어 정도로 툭 던지고 가면 아 그랬구나 라고 받아들였을 것을 작중 내내 열정과 목적에 속박되는 바람에 이 두 개념은 언급되는 횟수 만큼 무거우면서도 공감하기 어렵게 만든다.

모호한 관념,개념은 그것을 설명하기 보다는 그저 보여주는게 좋은데 말이다.

셋째로 마무리. 두 캐릭터가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이 별로였다.

가드너는 결국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지만 그것을 성취한 순간 이게 정말 내가 원한것이었나 라는 의문을 가지며 실망하게 된다. 그런 그는 22가 남기고 간 것을 보며 22가 느꼈던 감정을 떠올리고 22를 찾고 문제를 해결하고 22는 통행증을 되찾는다.

문제는 그래서 어쨌냐는거다. 결말에서 보여지는 모습은 모호함 밖에 없다. 22는 어떻게 되었고 가드너는 강사와 연주자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했는지 뭘 깨달았는지 보여주지 않고 모호하게 관객의 상상에 맡기며 끝내버린다. 열정과 목적을 그토록 언급해 놓고는 결말을 모호하게 만드니 어이가 없다. 열정과 목적을 부정하고 일상의 행복을 강조하기 위해 계속 열정과 목적을 언급한것과 마찬가지인데 이걸 자연스럽게 깨닫는 것이 아니라 열정과 목적을 찾는 과정속에서 겪는 부정적인 일을 통해서 일상의 행복만 남겨 강조를 시킨거나 다름없다. 마치 성공을 쫓은 주인공이 허무함을 느끼고 잃어버린 것에 대한 소중함을 깨닫는 그저 그런 스토리처럼 작위적인 구성을 취하고 있다. 성공과 행복, 달성에 대한 성취감, 가족애 등과 같은 것들은 작품마다 강조되어지는 부분이 다르다. 어떤 작품은 성공을 해서 행복해지고 어떤 작품은 성공보다는 가족애를 중시하고 각기 다르긴 하지만 소울에서 주인공 조 가드너는 그토록 바래왔던 일을 단 한번 성취 했을 뿐인데 허무함을 느낀다. 허무함을 느끼게 되는 타당한 과정이 결여된채로 이게 내가 바랬던 일인가 라며 의문을 갖는데 이는 캐릭터와 이야기를 허술하게 만든다. 행복이 중요하다는 결론에만 매몰되어 왜 그런지 과정을 날려버리고 결론도 대충 알아서 생각하길 바라는것 마냥 날려버린다.

심하게 말하자면 이건 단순한 겁쟁이의 행복론이다. 꿈을 이루어도 행복하지 못 하게 만든다면 갈구하는 것, 노력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그렇게 달려온 과정마저 바보취급을 해 버리니 조 가드너라는 캐릭터에게 연결될 공감대 영역이 줄어들고 만다. 그토록 바래왔던 것을 이루었는데 그렇게 쉽게 실망한다고? 심지어 목적에 매몰되어 통행증마저 빼앗으려던 이기적인 녀석이?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전개 때문에 조 가드너가 가진 열정마저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벌였는지 이해하기 힘든 결과를 만들고 만다.

차라리 과정을 조질거면 결말이라도 깔끔하게 내던가. 결말도 이 모양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