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6월 11일 목요일

영화 조커는 정말로 위험한 영화였는가?

2019년 호아킨 피닉스 주연의 조커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었다. 그 관심 중에서는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관심인 모방 범죄. 현실의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총기를 가지기 쉬운 미국이란 나라에서 조커를 따라 할 거란 기우에 기반한 부정적 관심이 컸다.



그러나 나는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과 관련된 폭동 시위를 보며 그들이 대체 왜 그렇게 조커를 무서워 했는가를 이전보다 더욱 이해 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미국에서의 인종 차별과 흑인의 위치는 최근 글들을 찾아 보면서 어느 정도 이해 하기는 했다.

https://redtea.kr/pb/pb.php?id=free&no=10653
https://pgr21.com/freedom/86458




미국의 문제는 너무 복잡해서 한국인인 나로서는 솔직히 이해 할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무리다. 당연하다. 내가 미국에서 살지 않으니까. 그래서 이 건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 자체가 솔직히 좀 주제 넘다고 생각도 든다.


하지만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아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나는 그들, 미국인들이 가난하고 무력한 백인인 아서 플렉이 외부적 요인으로 망가지는 과정을 통해 타락하여 살인자가 되어 가는 과정을 보고도 그들은 영화가 두렵다고만 하기 때문이다.


영화 조커가 정말 두려운 것은 한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요인으로부터 철저하게 사회에서 배척 당해 왔다는 점이다. 일개 소시민에 불과 했던 아서가 미치광이 살인자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철저한 무관심과 폭력을 당해 왔는데 아무도 관심 가지지 않았다. 도움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미국인들은 이 영화를 통해 현실을 고쳐야 한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두렵다고 판단한다. 이게 더 끔찍하다.



아서 플렉을 둘러 싼 문제의 대부분은 복지의 문제다. 복지 사각 지대에서 아서는 1)학대를 받았고, 2)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 했고, 3)안정적인 직업과 의료 보장이 없었다. 물론 아서가 첫 살인을 저지르는 지하철 3인조의 경우에는 복지하고는 상관이 없다. 부유한 직업인 은행원 3인조에게 린치를 당하는 가난한 직업의 광대 아서와의 강자와 약자의 구조였다. 강자가 약자에게 폭력을 너무나도 쉽게 휘두를 수 있는 구조의 문제였다.


아서는 그 상황에서 살기 위해 총을 쏘았다. 살기 위해서 였다. 물론 세번째 발포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그러나 아예 발포를 하지 않았다면 아서는 죽거나 불구가 되었을 것이다.


이 영화를 불편해 하는 것은 이런 상황이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클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말이다. 어째서? 왜?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았으면 할까? 내가 추론컨데 그들은 최소한 한번씩 자기보다 약한 상대를 향해

아서 플렉이 당했던 짓을 타인에게 해 봤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복수의 두려움은 요인을 제공하였기 때문에 발생한다. 원만한 관계에 있는 지인이 칼을 들어도 칼 맞을 짓을 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의 칼날이 자신을 향할 거라고 꿈에도 생각치 못 할 것이다. 하지만 원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칼을 들고 있는 순간 도망 칠 생각 부터 들 것이다. 미국인들은 조커가 불편해서 도망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도망을 쳐도 소용이 없으니 사람들이 못 보게 하여 사람들이 조커로부터 도망치게 만들고 싶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번 조지 플로이드 시위 사건을 보면 정작 트리거가 된 건 백인이 아니었다. 흑인이 죽을때마다 시위가 일어난다. 아서 플렉은 그가 죽던지 조커가 되었던지 사실 아무런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흑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크리스 락의 스탠딩 코미디 중에 이런 코미디가 있다. 뚱뚱한 여자는 날씬한 여자에게 뭔 말을 해도 돼. 하지만 날씬한 애들은 뚱뚱한 애들에게 그러면 안 되지. 그건 너무하잖아?

아마 이 말이 흑인이 내뿜는 폭력 시위에 대한 그들만의 답이라고 생각한다. 약자는 분노 할 자격이 있다 라는 전제를 깔아두고 흑인이 죽을 때마다 시위를 빙자한 방화와 약탈을 반복하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인종차별과 총기규제 등 사회 전반적인 문제를 까는 크리스 락 역시 아시아 혐오는 자연스럽게 저질렀으니 그 역시 똑같은 가해자일 뿐이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서 백인 남성이 분노 하여 사람을 죽인 조커라는 영화가 과연 그들 미국인들에게 얼마나 공감을 얻었냐는 것이다. 그랬다면 당장 조지 플루이드 시위 처럼 미국 전체가 들고 일어났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결국 조커는 생각만큼 위험한 영화가 아니었다. 오히려 조지 플루이드 사건을 영화화 하는 것을 막아야 할 것이다.


정말로 위험한건 서로가 가해자인 상황을 공유하며 개선 할 의지가 없는 미국의 모습이다. 미국은 차별이 만연한 국가고, 겉으로는 인종 차별을 터부시 하지만 정작 차별이란 차별은 갖가지로 다 하고 있는 나라다. 백인이 흑인을 차별하고 흑인이 아시아인을 차별하고 누가 누구랄 것도 없이 이 나라는 혐오로 살아간다. 그러나 오로지 흑인의 죽음만이 특별해지는 것은 정말로 내로남불이라고 밖에 할 말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 DC 영화의 조커는 흑인을 캐스팅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보다 더 개연성이 넘치는 캐스팅이 어디 있겠는가? 흑인 조커의 분노는 정당 할 것이다. 조커는 배트맨을 때려도 되지만 배트맨은 조커를 때리면 안 돼. 그건 너무 하잖아?



여담.
최근 조커에 대해 그런 평가가 있다. 조커는 극한의 광기를 가진 매우 지능적인 캐릭터다 라는 평가다.

그런데 이는 사실 시리즈가 계속 되면서 생긴 문제다. 배트맨의 시리즈가 계속 될 수록 배트맨의 적은 더욱 강해지고 똑똑해진다. 그런데 배트맨의 아치에너미는 조커이기 때문에 다른 적들보다도 조커가 더 뛰어나야만 하고, 그 결과 조커는 매우 치밀하면서도 혼란스러운 캐릭터여야만 했다. 사실 이건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게 배트맨 영화인 다크나이트에서 가능하게 되었으니 사람들은 더 이상 멍청한 조커를 원하지 않게 되어 버렸다. 힘도 쎄고 머리도 똑똑하고 별의 별 능력을 지닌데다 솜씨도 좋고, 그런데 미친 캐릭터. 하지만 조커가 처음부터 그런 캐릭터였던 것도 아니다. 렉스 루터가 처음부터 엄청난 천재는 아니었듯이 히어로가 강해지면서 덩달아 강해진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히어로를 약하게 만들 일은 없으니 조커도 렉스 루터도 강력한 악역이 될 수 밖에 없겠지. 어떤 사이트에서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가 조커 답지 않게 지능도 광기도 옅다는 글을 봐서 이야기 해 봤다. 조커는 원래 인간이다. 인간이 광기에 물든 것을 위협적인 존재로 표현을 한 것 뿐이지 범접할 수 없는 초인이 미친 것은 본말전도에 가깝다. 애초에 악당의 힘이 초인급이면 미치지 않더라도 악한 마음이 있으면 그걸로 악당 역을 충분히 할 수 있다. 조커는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초인이 나쁜 마음을 가져서가 아니라 평범한 인간이 미쳐서이기 때문이고, 그 광기가 전염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염되는 광기로부터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면 모두가 조커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