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4월 10일 토요일

엔딩이란 무엇인가

최근 진격의 거인이라는 작품의 결말에 대해서 사람들의 반응이 뜨겁다.


나는 1~2권 정도의 초반부 말고는 본적이 없는 작품이라 진격의 거인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지 않을 생각이다. 그 결말이란 것도 내가 자세히 알고 있는것이 아닌지라 딱히 이야기 할 것이 없다. 지금 내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엔딩. 즉 결말이다.


진격의 거인이 논란이 되는 이유는 바로 엔딩, 결말이 독자들에게 있어 납득하기 어려운 형태로 나왔기 때문이라고 본다. 사실 엔딩 논란이란건 대부분이 다 납득의 문제라서 그렇다.

 

결론만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별로 재미없는 이야기가 계속 이어질텐데 일단 내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결론은 엔딩이 대체 왜 망가지느냐이고 그건 아주 나중에 이야기 하고자 한다. 지금은 엔딩. 그것이 무엇인가이다.

 

 

대부분의 창작자들에게 있어서 작품을 만들 때 필요로 하는 능력이지만 간과하기 쉽고 가지지 못 한 자들이 많은 능력이 바로 결말을 내는 능력이다. 잘 내고 못 내고가 아니라 아예 결말을 못 내는 창작자들도 부지기수로 많다.

 

결말을 못 내는 이유는 다양하다. 일단 가장 용서받기 힘든 이유는 창작자가 게을러서, 의지가 없어서, 아무런 생각이 안 나서 등의 창작자 개인적인 이유다. 이런 창작자들은 대부분 반복적으로 결말을 내지 못 하기 때문에 나중에는 독자 또는 업계에 의해 알아서 걸러지곤 한다.

 

또 다른 이유. 업계의 사정. 만화 같은 경우는 편집부의 의향에 따라 잘 나가는 작품도 종종 이야기를 하다 말고 잡지에서 내려가는 경우가 많다. 대체적으로는 재미가 없다 이기도 하지만 잡지의 색에 맞지 않다, 혹은 이 작품이 비교가 되게 만든다 등 어이없는 이유들도 많다. 이런 경우 창작자 중에서는 개인적인 공간에 결말을 올려 놓는 경우도 종종 있는 편이다. 그리고 이런 케이스는 아니지만 잡지, 출판사가 먹고 살기 위해 일부러 작품을 질질 끄는 경우도 온전한 엔딩을 못 내게 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마지막 이유는 사실 고려 될 것도 없고 너무나도 이상한 이유들이라 거론 될 수준조차 아니지만 그래도 예는 예니까 드는 이유로 천재지변, 작가의 급사나 범죄 연류, 이 만화는 너무 불건전해서 사라져야 해요 식의 시민단체의 개입 등등 작가의 능력도 업계의 관행도 아닌 제 3의 사건들로 작품이 터지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우리가 살펴봐야 할 점은 오로지 작가가 엔딩을 제대로 못 내는 경우를 볼 것이다. 왜 엔딩을 못 내는 것인가. 또는 왜 엔딩을 망치는 것인가. 엔딩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엔딩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엔딩을 필요로 하는 이유, 즉 스토리의 시작도 알아야 한다.

 

창작자가 발상을 통해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경우 대체적으로는 두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흥미로운 요소들을 먼저 생각하고 시작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갑자기 몸이 작아진다거나, 동물과 말을 할 수 있게 되었거나, 남들과는 다른 세계에서 시작한다던가 등 변화로부터 이야기가 시작이 되는 경우다. 이 경우가 가장 흔한 창작자가 재미있게 발상하고 시작하는 경우이며 동시에 이야기를 제대로 끝맺지 못 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다른 하나는 어떤 일이 벌어지거나 벌어지지 않았으면 하거나, 이 일이 대체 왜 일어났을까? 어떻게 된 것일까? 라는 의문에서 출발하거나 하는 경우다. 변화가 아닌 사건이 중심이 된다. 목표를 정해두고 그것을 따라가기 때문에 갈아 엎느라 문제가 생기더라도 엔딩을 못 내서 문제가 되는 경우는 드물다.

 

첫번째의 흥미로운 요소 접근법은 너무 흔하다. 아이가 작아졌어요. 닥터 두리틀, 일본식 이세계물 등등 그런데 두번째 접근법은 생소한 편이기도 하다. '너의 이름은'이 국가적 재난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되돌릴 기회가 있었으면 하는 염원이 담겨 있고, '살인의 추억'은 이미 존재하는 화성연쇄살인사건을 재조명하는 점에서 시작한다. 이 글은 엔딩을 내지 못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첫번째 접근법에 대해서 이야기 하기로 한다.


첫번쨰 접근법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소재 접근법이다. 흥미로운 소재들을 던져 놓고 그 위에서 캐릭터들이 서로 흥겹게 놀듯이 이야기가 진행되는 형태다. 아마추어 창작자들이 숱하게 애용하는 방법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숱하게 좌절하는 부분이다. 왜냐. 소재만으로는 이야기가 성립되기 힘들기 때문이다.


도라에몽을 예로 들어본다. 도라에몽은 엔딩을 내지 못 한 케이스이며, 이야기의 구조에 있어서 옴니버스식 구성을 취하고 있는 만화이다. 옴니버스식 구성은 짧은 이야기들을 여러 편 전개하는 형태로 소재 접근법이 가장 많이 애용되는 구성이다. 즉 여기서 이야기 하는 소재 접근법에 딱 어울리는 예시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실패한 예시가 아니라 성공한 예시다. 실패한 예시는 너무나도 많아서 언급 할 가치가 없다.


도라에몽 이야기의 시작이 되는 소재는 도라에몽이다. 미래에서 온 아이 돌보기 로봇이다.


미래, 로봇, 아이돌보기 라는 요소들로 흥미로운 소재를 가져와 만든 것이 도라에몽으로, 도라에몽은 미래의 과학 기술을 선보이며 다양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여기서 소재. 즉 단순히 미래의 로봇이 등장하면 어떨까? 라는 소재를 가지고 이야기를 시작한다면? 그것만으로는 이야기가 되지 못 한다. 소재만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도라에몽을 도라에몽으로 있게 만드는 것은 바로 소재. 도라에몽이 아닌 노진구와 그를 둘러싼 환경이다. 도라에몽이 과거로 올 수 밖에 없는 이유. 즉 노진구라고 하는 캐릭터가 너무나 못 나서 그를 돌봐야 하는 원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노진구는 왜 못 났을까? 노진구는 이슬이를 좋아하나 이슬이에게 호감을 줄 정도로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 했다. 그 이유는 노력을 하지 않아서다. 노진구에게는 노진구가 가지고 있는 장점들, 그리고 노력해서 얻어 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지만 노진구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노진구를 괴롭히는 친구들, 노진구를 위축되게 만드는 엄마, 노진구와 다른 면에서 두각을 내 보이며 비교가 되게 만드는 친구들, 그리 특출날 것 없는 환경, 노진구를 알아주는 사람의 부재 등 여러가지 이유들이 겹쳐서 미래의 노진구를 만든다. 그리고 그 노진구가 미래에서 실패하였기 때문에 후손이 도라에몽을 보낸다. 이것이 도라에몽 이야기의 시작이다.


한편 도라에몽 역시 노진구 마냥 아픈 과거들이 산재해 있다. 구설정 기준으로 불량품으로서 같은 도라에몽 시리즈와는 다른 취급을 받아 컴플렉스가 있고, 쥐에게 귀가 뜯겨 공포를 갖고 있으며, 그런 도라에몽 역시 노진구처럼 실패로부터 의기소침 해 져 있었으나 그런 도라에몽을 달래기 위해 과거로 돌아가 노진구를 돌봐 달라는 임무를 받게 된다. 노진구와 비슷한 아픔을 겪은 도라에몽이었기에 그리고 노진구처럼 덜떨어진 로봇이었기에 도라에몽은 노진구의 친구가 될 수 있었다. 도라에몽은 옴니버스식 구조이지만 스토리의 시작을 이루는 노진구의 미래 바꾸기라는 주제를 통해 은연중에 행복해진 미래의 노진구 모습을 드러 낼 수 있게 된다. 덕분에 시작과 결말이 함께 갖추어져 있어 결말을 내지 못 했어도 독자들은 결말을 쉽게 예상 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지 않으려 했으나 그래도 몇가지 예를 들자면 소재 접근법들은 앞서 말한 작아진다, 동물과 말을 한다, 이세계로 간다 등등이 있다. 이런 소재 접근법의 문제는 소재가 매력적이라 생각되어 소재에만 열을 올린다는 점이다. 하지만 많은 창작물들의 뼈대를 이루는 것은 이야기이지 소재가 아니다. 주인공이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어도 그를 돋보일 사건이 없고, 고난이 없으며 목적이 없다면 이야기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생각 해 보라. 우리들 주변에도 꼭 최고는 아니어도 각각의 특출난 점이 있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우리가 기억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능력이 아닌 사건에 기반하여 인지한다. 능력이 없더라도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몸을 사리지 않았다면 의인으로 기억하며, 한푼 두푼 모은 돈으로 타인을 돕는다면 그의 선행을 칭송한다. 아무리 스포츠를 잘 해도 그가 자신의 재능을 모르고 프로가 아니고 승리한 적이 없다면 우리는 그가 누군지도 모른다. 스포츠물의 시작은 평범한 것 같은 주인공이 재능을 발견하고, 프로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라이벌들을 만나 성장하고 승리한다. 반면 타인을 도울 초능력이 생겨도 돕지 않으며 사건이 터져도 관망하고, 그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않는다면 그는 그저 엑스트라 수준의 인물일 뿐이다.


소재 접근법 외의 접근 방식은 상황 또는 사건 접근법이다. 사건 접근법은 소재 접근법을 아예 사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비교적 덜 의존하는 경향이 있고 가장 많이 두드러지는 장르가 순정 계열이다. 예컨데 순정 만화의 기본적인 구성은 여자 주인공과 남자 주인공의 만남,사건,연애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여자 주인공의 특성은 가난,평범,오타쿠,비만 등이 있고, 남자 주인공은 꽃미남,짐승,부자,엘리트,말썽꾸러기,치유계 등이 있다. 위에서 언급한 도라에몽은 도라에몽 자체가 소재이고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중심이지만 순정 로맨스 구조에서는 이러한 특성들이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끌어나가지는 않는다.

 

순정만화가 다른 작품과의 차별성을 지니기 위해 여자 주인공은 신이 되고, 남자 주인공은 요괴가 된다던지, 남자들은 동물로 변한다던지, 남자가 만화가이고 여자가 어시스던트라던지, 소녀는 마법을 통해 다른 모습으로 변신한다던지, 소년과 소녀가 아이를 돌봐야 한다던지, 혹 러브 코미디에서는 남자가 여자로 변하고 여자는 남자처럼 드세다던지 등 여러가지 변칙 구조가 있지만 순정만화의 가장 원초적이고 기본적인 클리셰인 Boy Meets Girl의 Meets 이 바로 사건 중심 구조를 뜻한다. 사건 중심 구조는 소재 중심 구조보다는 명확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사건의 매듭을 지으면 곧 결말로 다가가게 된다. 그것이 장편 구성이든 단편구성이든 간에 말이다.


자. 그럼 원점으로 돌아가서 왜 엔딩이 제대로 나오지 못 하는 가에 대해 이야기가 어떻게 시작되는지를 알아 보았다. 그러면 이런 요소 접근법식으로 시작된 이야기에서 엔딩은 어떻게 나오는가?


나는 이야기를 대주제, 중주제, 소주제 식으로 분류하는 편이다. 보통 이것을 플롯이라고 부르지만 이 용어는 여러모로 혼재된 느낌이 강하여 나는 주제식으로 분류한다.

 

대주제는 이야기의 시작 원인을 다룬다. 즉 이야기의 출생이다. 예를 들어 보자. 

 용사가 나타났다. 왜? 마왕이 세계를 어둠으로 뒤덮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왕을 쓰러뜨리면 용사의 할 일이 사라진다. 자연적으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 

누군가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떠난다. 마찬가지로 복수를 끝내면 이야기는 끝이난다.

여자와 남자가 만나 사랑에 빠진다. 인연을 맺고 행복하게 살면 이야기는 끝이 난다.


반면 이야기의 시작이 결말과 관련이 없는 경우가 있거나 전개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예컨데 폐부 직전의 서클에 들어가는 것이 도입부로 시작되지만 부의 존립이 전개 또는 결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경우다. 이런 경우는 나에게 있어서 대주제로 분류를 하지 않고 중주제식으로 분류를 한다.

 

중주제식은 시작이 아닌 각각의 사건들을 다룬다.  예를 들어 보자.

악당이 활개치는 도시에서 정의를 지키고자 영웅이 등장한다. 하지만 사회는 부패하여 악당들을 잡아도 잡아도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온다. 영웅에게 각각의 강한 악당들이 나타나 사회를 혼란에 빠트린다. 각각의 악당들과 대립하며 그들을 쓰러뜨리면 하나의 범죄가 끝이 나지만 도시에 평화가 찾아오는 것은 잠깐 뿐이다. 

세상을 동경하는 소년이 있다. 소년은 자신이 살고 있는 좁은 세계에서 벗어나 더 넓은 세계를 탐험하길 원한다. 우연한 만남과 계기를 통해 소년은 좁은 세계를 벗어나서 다양한 사람들과 사건들을 만나게 된다.

세기의 명탐정이 있다. 그리고 그가 가는 곳에 우연찮게 발생하는 미지의 살인사건들이 일어난다. 탐정은 범인을 잡기 위해 고군분투하나 추리를 하는 와중에도 살인은 계속 발생한다.


중주제 방식은 목적과 시작 계기가 불명확 하더라도 꾸준한 사건들이 일어난다. 중주제에 해당하는 사건들을 해결해도 결말이 오지 않는다. 주인공의 목적은 명확한 끝이 없거나 목적 자체가 없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주인공이 원하든 원치않든 사건을 찾아가고, 사건이 찾아오는 구조다. 

 

중주제 방식의 문제점은 목적이 불명확하기 때문에 결말을 내는 타이밍이 확실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래서 보통 사용되는 방식은 주인공의 아치 에너미를 출현시켜 그를 잡아냄으로서 결말을 이루거나, 주인공에게 목적을 부여하고 이루게 하는 방식, 혹은 주인공이 만족하여 도입부의 시작 원인을 스스로 끝마치는 형식 등이 있다.


소주제는 대주제의 하위의 중주제의 하위가 아닌, 대주제도 아니고 중주제도 아닌 별개의 구성이다. 이유는 대주제 혹은 중주제가 가지고 있는 도입부의 목적성이 없기 때문이다. 주로 옴니버스타입이라고 설명하기 쉬운 형식으로 짧은 단편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져 있고, 각 화가 이전화 또는 다음화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이러한 구조는 단편, 공포, 코미디, 구르메, 일상물 등 꾸준한 분위기를 유지한채 연결된 형식을 이어나가기 힘든 장르에서 많이 보여진다.

매 이야기들이 짧은 형식으로 끝을 내기 때문에 결말 자체는 꾸준하게 마무리 짓는다. 하지만 대주제 형식과는 달리 이 소주제 방식은 끝을 내더라도 완연한 만족감을 느끼기가 어렵다. 작품의 굴곡이 크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주는 감동 역시 크지 않다. 그러나 결말을 낸다는 점에서는 대주제,중주제 구성보다 더욱 결말을 내는 타이밍을 수월하게 잡을 수 있다. 언제 끝내더라도 결말이기 때문이다.



자. 그러면 이제 이 글의 결말을 향해 달려가자. 이 이야기를 왜 언급하였는가?

 

소재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장르에서 결말을 내기 어려운 경향이 있다.

중주제 방식에서 결말을 내는 타이밍이 확실하지 않다.

그리고 마지막 한가지. 대주제를 위배한다 이다.


독자들은 종종 그런 경우를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분명 거창하게 싸움을 시작했는데 잘잘못을 따지는 과정에서 이놈도 사실은 좋은 놈이었어 라는 패턴이 나온다. 그러면 선과 악을 나누는 싸움에서 모호한 정체성으로 누가 이기더라도 찝찝하던가 아무도 이기지 않는 결과가 나오기도 한다.


이러면 대주제인 누군가를 쓰러뜨리기 위한 싸움의 목적이 변질되어 방향성을 잃게 된다. 분명 대주제의 목적을 따라 이야기를 전개 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무엇을 쓰러뜨리고 무엇을 지킬것인지 모호해지면 결국 결말은 어떻게 되는가. 대주제가 세운 길에서 벗어나게 되어 결말을 내더라도 결말 같지 않게 느껴진다. 이는 대주제와 비슷한 구조인 중주제 구조도 마찬가지다. 비록 대주제보다는 조금 느슨할지어도 중주제 역시 중주제가 세워진 목적을 위배해서는 안 된다.


반면 소재 위주의 소주제 구성에서는 즉 옴니버스 구성에서는 소주제 그 자체가 목적이고 결론이기 때문에 위배라는 감정이 생기지 않게 된다. 옴니버스 구성의 심슨 가족을 보자. 어떤때는 바트심슨이 당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골리기도 한다. 심슨 가족은 사건에 휘말리고 주변에 피해를 주기도 하지만 어떤때는 심슨 가족 자체가 배척 당하기도 한다. 심슨 가족의 목적성은 심슨 가족의 에피소드이기 때문에 정의,선,악,사랑,모험,복수 등 이런 매 화를 관통하는 주제가 없다. 즉 에피소드간의 연결고리가 없다.


목적,사건,소재 별로 구성을 다 나눠 봤지만 각각의 주제별 접근법마다 난항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대주제 방식은 이야기의 시작을 위배하면 안 되고, 중주제 방식은 결말의 타이밍을 잡기 어렵고, 소주제 방식은 소재만으로는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창작자는 꾸준히 작품을 만들고 완결 지어야 한다.  경험을 통해서 결말의 맛을 숙지해야만이 온전히 납득 할 만한 결말을 만들 수 있다.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는 결말을 짓는 방법에서도 크게 차이가 난다. 이슈가 되는 소재를 움켜쥐고 대중의 인기를 한몸에 받았지만 고꾸라지는 작품들을 보면 대부분 창작자가 갓 데뷔한 경우가 많다. 신선하고 특별한 소재를 찾는 능력은 젊고 어릴수록 유리하겠지만 그 소재가 얼마나 재미있을지,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낼수 있을지, 결말로 어떻게 다다를지는 경험에 따라 다르다.



그래. 엔딩이란 무엇인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건 경험이고 공감이다. 결말에 다다르는 표준적인 양식이 존재하더라도 결국 결말을 온전히 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창작자의 의지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