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 22일 일요일

대한민국 입시제도. 수시? 정시? 무엇이 문제인가.

조국의 딸 입시 관련 과정 문제로 수시냐 정시냐에 대한 갑론을박이 연이어 벌어지고 있다.

수시는 내신과 학생부를 반영해서 정시 이전에 입학생을 뽑는 과정인데 더 자세하게 들어가면 너무 복잡하니 이 정도로만 언급.

정시는 수능을 통해 점수로 입학생을 뽑는 과정이다.



내 이야기를 하자면 나는 수시의 혜택을 볼 뻔 했다. 기독교 대학 쪽에 인터넷 쇼핑몰 학과 쪽에 수시를 붙었는데 멍청한 할머니가 무교인 내 종교관도 아니고 할머니 자신의 종교관과 맞지 않는다고 가지 말라고 떼를 쓰는 바람에 수능을 얼마 안 남겨 둔 상황에서 대학교 진학을 포기 했어야 했다. 차라리 정시를 한참 남겨두고 포기 했었으면 수능이라도 보려고 준비를 했겠지만 그러지 못 했으니 나는 결국 처참한 수준의 수능 점수로 컴퓨터 학원에서 가르칠법한 커리큘럼을 운영하는 전문대에 들어가서 배울게 없다고 생각하여 자퇴했다. 1년 반동안 배운게 C초급,PHP초급 수준이면 차라리 그 돈과 시간으로 컴퓨터 학원을 가는게 더 낫고 그게 당연하다.

아무튼 나는 그 일로 인해 할머니와 깊은 골이 생기고, 할머니가 믿는 종교를 혐오하게 되었고, 완벽하게 종교적으로는 아무것도 믿지 않게 되었다. 결국 종교는 누군가를 끌어들여 수입을 벌어들이기 위한 사기 행각이라고 밖에 받아들이지 않으며, 같은 이유로 무언가를 심하게 찬양하고 빠는 행위를 매우 극도로 혐오한다.


그리고 수시에 합격하여 수능 공부를 할 필요가 없던 나는 수능을 대비하던 친구들에게는 사실 민폐에 가까운 인간이었고, 면학 분위기를 저해하였기 때문에 그 점에 있어서는 지금도 후회하고 있고, 그때 같은 반 친구들에게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대체 왜 수시 합격자를 억지로 야간 자율 학습에 쳐 넣었는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공부 할 이유도 마음도 없는 인간을 공부 해야 만 하는 집단에 넣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짓거리다.


정시와 수시에 대해 어느 것이 옳다 라는 판단을 이야기 하기 전에 각각의 세간의 평가를 보면 다음과 같았다.

정시는 똑똑한 학생이 가고, 수시는 부지런한 학생이 간다. 물론 부지런한 학생이라기 보다는 자녀의 입학사정에 부지런한 부모를 둔 학생이 가는 것이겠지만.

이를 두고 떠올린 것은 마치 과거에 똑똑하고 게으른 상관 vs 멍청하고 부지런한 상관 이야기가 떠올랐다. 딱 그런 느낌이다. 정시에 합격했다 해서 게으른 것도 아니고, 수시에 합격했다 해서 멍청한 것은 아니겠지만 확실히 정시로 이기지 못 할 것 같으면 수시를 노리고, 수시를 노리기엔 너무 복잡하고 시기를 놓쳐 머리로 승부하는 정시라는 느낌은 있다. 그렇게 대학으로 올라온 사람들은 위에 말한 똑똑하고 게으른 학생 vs 멍청하고 부지런한 학생이 되는 것인가 싶기도 하고.



과거. 그러니까 내 대입 시절은 15년도 넘게 지난 과거의 일인데 그때는 정시에 인생 올인하다가 망해서 자살하는 학생들 이야기가 많이 나돌았다. 그래서 정시는 안 된다. 1년 동안 공부 해서 단 한번의 기회에 날아가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이런 이야기가 나돌았고, 그래서 수시 옹호가 일어났다.


그런데 왠걸. 지금은 오히려 수시가 더 인생 한방. 미리미리 초중고 내신을 작업 해 두지 않으면 수시는 꿈도 못 꾸고, 오로지 정시로만 가야 한다. 만약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내가 대입을 앞둔다면 정시는 꿈도 못 꾼다.

일단 부모부터가 할머니랑 할아버지였기 때문에 바뀐 입시 제도에 대해 아는 지식이 전무하였던터라 수시 정보를 전혀 따 올 수가 없다. 내가 수시에 합격 했던 것은 그때 수시에 대한 기준이 좀 애매하기도 했고, 반 담임 선생님이 정말 불철주야 학생들 대학 보내려고 노력했기에 담임 선생님 도움으로 간 거였는데 부모 덕을 볼 수 있을리가 만무하며, 심지어 초중고 내신을 제대로 땄을리도 만무하다.

일단 그놈의 내신에 대한 것이 학생들이 노력한다고 얻어지고 찾아내고 시도 할 수 있는 수준도 아니라고 보며, 정말 말도 안 되는 것들만 들어 있다.

예컨대 나 때도 괴롭혔던 봉사 점수 같은 경우는 이걸 왜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이 그저 해야 하니까 해야 했었다. 학생이 봉사를 필요로 하여 도움을 주겠다 라고 결정을 내려 한 것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나는 동사무소 등본 정리 같은 행정업무 도우미 같은 일을 봉사활동이라고 했었고, 그 외에도 그냥 잡무 어디 일손 부족한 곳에 공짜 인력 들어가는 식으로 노동력을 제공했어야 했다.

나는 지금도 이러한 행위를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군대도 그렇지만 이런 식으로 노동력을 거저 먹는 식의 방식은 그냥 일제시대의 잔제물 정도라고 밖에 치부를 안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입시에 통하니까 남들 다 하니까 식이 되어 이 봉사활동이 정말로 필요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고찰 따윈 없고 점수가 필요하니까 하는게 전부다. 이럴거면 그냥 군대처럼 강제 징집 시키고 강제 노역 시키던가. 이게 뭐하는 짓이냐?

독서 상황 같은 것도 마찬가지. 내때도 이게 적용이 되었는지 고등학교 내내 담임 선생님이 각자 학생들에게 집에서 볼만한 책을 가져 와서 반 책꽂이에 넣으라고 했는데 사실 이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내가 교과서 이외의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도 아니고 대학교도 아니고 대학교를 자퇴하고 혼자만의 시간이 늘어났을때부터 도서관을 다니고, 보고 싶은 책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학교 다닐때는 반강제적으로 학원부터 다녀야 했고, 나머지 시간에 책을 읽는 것이란 거의 힘든 일이었다. 남는 시간? 게임 할 시간도 부족했고, 심지어 운동은? 더 말도 안 되지. 학생에게 있어서 시간이 남는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하루 중 대부분은 학교에서 보내고 그 나머지도 학원이나 과외로 보내는데 그나마 과외나 말이 되지. 집에 오면 과외선생님이 있는 것과 학원차 타고 학원까지 가고, 남들 상황에 맞춰 공부시간 쉬는시간 나누고 다시 학원차 타고 집에 오는 시간을 생각하면 과외를 받는 것이 학원보다 시간이 남으며 이는 돈으로 시간을 사는 매우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위라고 볼 수 있다. 학생에게 제일 필요한건 시간인데 이건 과정을 등한시하고 결과부터 요구한 셈이었으니 제대로 돌아갈리가 있나. 특히 정시로 가는 학생은 수능 문제집 보는데 시간을 쏟지 여유롭게 책을 볼 시간도 없고, 그러면 당연히 수시를 보는 입장에선 정시를 보는 사람들과 입장차이가 생기게 된다. 수시는 정시 페이스를 맞춰 갈 수 없고, 정시 역시 수시 같은 것을 생각도 못 한다. 같은 시간을 두고 어느 한쪽에 치중해야 하는 상황에서 이는 공존이 불가능하다.


동아리 활동 같은 것도 학교가 어지간히 크고 잘 나가는 학교가 아니라면 제대로 된 동아리가 있을리 만무하며, 수상 경력 같은 것도 마찬가지. 일부만이 받는 상을 가지고 이걸 내신이라 하면 상을 받지 못 하는 도전자들에겐 무의미한 시간 낭비 일 뿐이며, 이 또한 정보력과 수상을 하기 위한 과외나 준비력에 있어서 빈익빈 부익부가 심하게 나타나는 부분이다.

심지어 이와 맞물려서 교사의 평가가 기록되면 절대 바꿀 수도 없어 잘 나가는 학생에게 수상이나 내신을 몰빵하는 현상이 발생한다니 이는 오히려 나 때의 입시보다도 더 후퇴한 상황이나 다름 없다. 계급제를 이름만 바꾼거랑 뭐가 다른가? 이게?


물론 정시라고 멀쩡한건 아니다. 애초에 정시가 너무 빈익빈 부익부 차이가 심하고 학생들의 부담이 크다는 이유에서 수시가 나왔기 때문이니까.

문제는 그 수시가 오히려 더 부담이 크고 돌이킬 수도 없는데 수시 비중을 더 늘려 버리니까 정시로 가는 학생들의 기회를 빼앗고 부담을 더욱 가중시키는 상황이고, 현재 정시의 상황은 인강의 도입이 활발해져 빈익빈 부익부는 차이가 줄어든 반면 수시가 되려 빈익빈 부익부가 심화되어 입장이 역전 된 상황이다.


그래서 정시와 수시에 대한 내 생각은 정시쪽이다. 만약 내가 다시 시간을 거슬러 대입을 앞둔 상황이었다면 정시를 선택 했을 것이고, 그 편이 종교관 차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할머니한테서 기회가 망가질 일도 없고, 최소한 내가 같은 반 친구들에게 민폐가 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며, 탱자 탱자 놀다가 부랴부랴 준비하는 난장판도 없었을 것이고, 정시로 떨어진다 하더라도 내 실력이 어떤지를 가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물론 그 당시의 어린 내가 정시라는 부담을 그때 당시의 내 정신 상태로 온전히 받아 들일지는 지금 생각 해 봐도 좀 그렇긴 하지만 어차피 그때 내가 지금의 입시 제도에 직면 해 봐야 답은 정시 뿐이고, 결국 그때나 지금이나 답은 정시 뿐이니 정시 밖에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학생 아니 사람에게 있어서 더 나은 상황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공부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공부하는 습관, 자세 무엇이든 간에 목표로 세운 것을 달성하기 위해 계속 유지 할 수 있는 힘이 중요하고, 이는 학생의 주변 환경이 큰 영향을 끼치기에 사실상 학창시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학생이 공부를 꾸준히 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여 장차 성인이 되서도 그 자세를 유지 할 수 있게끔 하는게 중요하지 당장의 대학 입시가 중요한게 아니다. 어차피 대학을 졸업 해도 사회에 나가면 끊임없이 시험을 보고 시험 당하고 수많은 시험에 직면한다. 대학 입시만이 시험이 아니기에 항상 밀려 들어오는 시험들을 받아 들일 수 있는 자세를 키워 줘야 하는데, 현 교육 상황과 입시 제도 그리고 사회의 시선에서는 대학을 중요시하여 좋은 대학을 가는 것이 목표이지 무엇을 하려는지는 중요하지 않기에 그런 공부 할 수 있는 자세를 키우는 것 보다 좋은 결과를 내는 것만을 보고 있는 점에서 문제가 있는 것이다. 수시는 그런 점에 있어서 공부하는 자세도 망가뜨려 버리기에 더더욱 폐단에 가깝다. 옛말에 물고기를 주기 보다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가르치라는 말이 있다. 난 이 말이 지금의 교육 상황에서 가장 들어 맞는 말이 아닌가 싶다.


인생. 대학이 전부가 아니고 대학 외에도 가야 할 길들이 많다. 그 길들을 꾸준히 가기 위해서는 실력도 중요하지만 꾸준함도 필요하다. 그러기에 학생들에게 중요한 것은 봉사점수를 따느니 이것저것 책을 읽느니 수상을 받느니가 중요한게 아니라 공부를 꾸준히 유지 할 수 있는 환경이 중요하다.

특히 저소득층은 공부를 할 수 있는 환경이 좋지 않기에 성과가 좋지 못 하고, 그런 연유로 저소득층 배려 특별 전형을 두고는 하지만 이는 해결법이 전혀 되지 못 한다. 공부를 할 자세가 되지 못 한 사람을 특별 전형으로 올려 봐야 그것으로는 해결이 되지 못 한다. 단지 그 편이 저소득층의 가정 환경을 바꾸고 공부를 할 수 있게끔 하는 것 보다 쉬우니까 하는 것 뿐이다.


학업 점수의 빈익빈 부익부가 일어나는 원인은 공부를 할 수 있는 환경에서 벌어지고, 공교육은 이를 보완 할 수 있는 부분으로 가야 한다. 대학을 보낼 수 있느냐 없느냐를 가지고 과외와 인강으로 쏠려 공교육이 무너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진작에 무너진 교육이다. 무너지고 있는게 아니라 이미 무너진 상태다. 물론 나는 그런 이유로 공교육은 무너져 있는 상태라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공교육에 기대야 한다면 그건 보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사교육의 투입을 막을 방법 따윈 없다. 그건 불가능하다. 그놈의 대학 진학과 취업 때문에 진로를 돌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이 지금도 꾸준히 늘어나는데 만약 공교육의 목표가 대학 진학이 최우선의 목적이라면 차라리 공무원을 목적으로 하는 고등학교 같은것을 만들어도 이상할 것이 없지 않은가? 어차피 그거나 그거나 다를게 없기 때문이다.


목적을 대학과 취업 같은 것으로 두면 그냥 그에 맞춘 학생들만 나올 뿐이다. 그러니까 학교는 학교로서 기능을 못 하고 대학교에 보내기 위한 학생 제조 공장이 될 뿐이다. 그리고 공장이 영 신통치 않으면 따로 자원을 투입하는 거고. 이러한 과정은 막을 수 없다. 나때에 딱 그랬다. 만평같은데서 보면 학생들을 학교에 컨베이어 벨트로 보내면 다 똑같은 학생들만 나오는 식의 풍자 만화 같은게 있었으니까. 그런데 지금도 다르지 않다. 수시가 도입되었는데 뭐 달라졌는가? 여전히 대학에 보내기 위한 입시를 쫓아가고 있을 뿐이다. 그저 공부 이외의 방법으로 별 해괴한 채점 기준을 두어 보내는 것이 추가 되었을 뿐 근본은 바뀌지 않았다.


공부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들자. 대학에 갈 수 있는 사람을 만드는게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