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7일 목요일

조커 - 넌 아마 이해 못 할 거야


어제부터 조커 VOD가 올라 왔는데 어제는 내가 일진이 안 좋아서 영 감상 할 컨디션이 아니다 보니, 오늘에서야 봤다.


놀라우면서도 평범하고, 공감과 비공감대의 영역을 오고가는 정말이지 난해한 영화가 아닐수가 없다.

그리고 조커에 신나 밈으로 활용한 게시물들에 노출되어 부분적으로 스포일러를 당하면서 감흥을 느끼지 못 한 부분도 있었던터라 많이 아쉬운 부분이 있는데, 이 영화는 부디 스포일러 없이 그리고 배트맨도 조커도 염두해 두지 않고, 오로지 아서 플렉이라는 인물에만 집중해야만 수월하게 감상이 될 것이라고 말해두고 싶다.


스포 없는 부분만 이야기 하자면 영화 자체는 매우 대단하다.  배경음도 녹아들고, 배우의 연기하며 분위기 모두 압도한다.

처음 30분 정도는 아서 플렉에게 깊은 공감으로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문제가 아닌 타인에 의해 고통받는데 이는 형태는 다르지만 누구나 겪을법한 혹은 겪었을 법한 문제들에 직면하고, 고통받고, 괴로워하는 아서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모습과 비추어 보게 만든다.


여기서부터 스포일러가 있으니, 보고 싶지 않다면 패스하기를.








그러나 그가 좋아하던 머레이쇼를 보며 망상에 젖게 되는데 이후에도 종종 망상과 현실이 교차되며 무엇이 허상이고 무엇이 진실인지를 알기 힘들게 되며 아서 플렉이 겪고 있는 고통과 현실에 접근하기 힘들게 된다. 초반에 그를 바라보며 다가갔던 공감대는 어느새 거리를 두게 되고, 그의 망상이 벽이 되어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깝지만 진실을 확신 할 수 없는 상태를 만든다.

그런 상황과는 상관없이 아서의 상황은 꼬여 가기만 하고 급기야 노망난 어머니로부터 토마스 웨인과의 관계를 알게 되는데, 이는 정말로 지독하리만치 치명적이지 않을 수가 없다.


현실이 괴로운 사람 특히 아서처럼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갑자기 툭하니 아버지가 대기업 부호였다 라는 이야기가 나오면 흔들릴 수 밖에 없다. 가정환경이 불행 할 수록 내가 더 나은 집에서 태어났더라면 하는 생각을 갖기 마련인데 이는 안 그래도 망상증이 있는 아서에게 있어 토마스 웨인은 아버지의 존재를 그리워 하며 거지같은 삶 속에서 그를 구원 해 줄 빛으로 여겨 졌을 것이다.

허나 그러한 아서를 기다리고 있는 사실은 어머니가 아서처럼 혹은 아서가 어머니처럼 아서의 어머니는 망상에 미친 사람이라는 반응 뿐이었고, 어머니를 믿고 있던 아서에게 있어서 그런 반응은 참을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그리고 아무도 그를 존중하지 않고 인정하지도 않고 무시하는 세상 속에서 광대 분장을 했을 때 자신을 공격한 화이트칼라 직종의 3인방을 총으로 쏴 죽인 것이 세상의 공감을 사고, 아서가 분장한 광대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아서의 심정이 변화하게 된다.

아버지처럼 동경하던 머레이는 그의 코미디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사게 만들고, 아버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토마스 웨인은 어머니를 미친사람이라 하며 자신을 공격하고, 사장은 자신을 무시하고 그를 린치에 몰아넣고 해고를 시키고, 직장동료는 그를 배신하고 나몰라라 하고, 그가 꿈꾸는 코미디언으로서의 길은 가망이 없고, 연인이라 생각했던 같은 아파트의 여자와의 관계는 그저 망상에 불과했고, 사람들은 광대인 자신을 향해 존중을 하지 않고, 그에게는 원치 않는 상황에 웃음이 발작하는 병이 그를 괴롭히고 방해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병원에서 어머니의 기록을 찾아 보던 중 그는 그가 입양된 아이이고, 어머니에게 학대 당해 억지로 웃음이 나오는 병을 앓게 되었고, 그 어머니가 망상증에 걸린 미친 여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를 둘러 싼 모든 관계들이 마치 그를 거부하듯이 끊어지고 벽이 세워지는 듯한 그 와중에 자기 자신은 끝없이 추락하는 듯한 상황속에서 아서는 지하철에서 자신을 괴롭힌 3인방을 죽였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를 얽매이고 옥죄는 모든 것을 털기 위해


어머니를 질식사 시키고, 자신에게 총을 준 사실을 회피하고, 지하철 사건과 관련하여 경찰의 물음에 입을 맞추려고 회피하는 동료 랜들을 찔러 죽이고, 머레이쇼에 출연하여 그가 지하철에서 3명을 죽인 범인임을 공개하고, 방송에서 자신을 조롱했던 머레이를 총으로 쏴 죽인다.


그 과정속에서 그가 심정적으로 모든 짐을 내려 놓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 계단의 춤사위는 그에게 공감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모든 것이 해제된 그의 심정에 다가가게 만들 수 밖에 없게 만든다.


이 영화는 여러모로 생각 할 것들을 만드는 영화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아서의 망상일수도 있다는 가능성과 맞물려 섣불리 예단하기 어렵게 만든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느낀 몇가지를 이야기 하자면 일단 첫째로 아서가 스탠딩 코미디에서 말한 부분이 너무나도 와닿는다.

아서는 학교 가기 싫다는 말에 어머니가 공부 열심히 해야 나중에 먹고 산다고 하고 이에 코미디언이 되겠다는 말로 응수 한 것을 이야기 한다. 그리고 부자들은 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부분부터 소리는 끊기며 아서의 망상으로 넘어가는데 나는 이 부분이 아직도 마음에 걸리는 부분으로 남아 있다.


왜냐하면 내가 이 영화의 초반에 공감 할 수 밖에 없었던 것. 그것은 아서를 둘러 싼 거지같은 환경과 존중받지 못 하는 상황이 현대에서는 서비스직에서 주로 발생하는 일이고, 아서가 코미디언이 되겠다는 말이 마치 서비스직을 할건데요 라는 말처럼 받아 들여졌기 때문이다.

서비스직의 직업병 중 하나는 원치 않는 상황임에도 감정을 억누르며 웃어야 하는 것이 있는데, 이는 웃고 싶지 않은데도 억지로 웃어야 하는 직업. 아서의 직업인 광대와 웃고 싶지 않은데 웃게 되어 버리는 아서의 정신적 질환이 닮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특히 서비스직이 경쟁에서 떨어져 나온 사람들이 선택하기 쉽다는 점에서 이는 블랙 조크보다도 더 신랄하게 다가온다. 스탠딩 코미디에서는 코미디언이 될거에요 라고 했지만 이는 되고 싶어서 된 것이 아니라 결과론적으로 될 수 밖에 없었던 점에서 자아비판이라고 보여질 정도이다.


또한 아서를 괴롭혔던 회사원 3명의 죽음을 광대라고 하는 무서운 이미지에 당한 희생양처럼 내보내는 언론은 마치 착한 사람이 당한 것 처럼 이야기 하지만 영화를 통해 보여진 그들의 행동은 결코 착하지 않았다. 아서가 말한 "내가 죽었다면 내 시체를 밟고 갔겠지 난 거들떠도 안 보면서 토마스 웨인이 추모하니 놈들 죽음은 슬프다?" 라는 것처럼 아서가 당했더라면 아무도 슬퍼하지 않았을 것이고, 사회적 약자인 아서의 코미디 영상을 틀고 조롱했던 것 처럼 사회적 약자를 짓밟고 조롱하는데 익숙한 것에 대해서는 사람 모두가 악독하지 않다며 외면하려 한다. 머레이는 경찰 두명이 사경을 헤맨다고 했으나, 정작 경찰이 지하철 같이 좁은 곳에서 먼저 총을 발포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외면하고 있다. 일방적으로 따돌림을 당해야 할 대상을 만들고 사회적으로 안전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테두리 밖에서 그들을 공격하는데 여념이 없다. 심지어 토마스 웨인은 그 세명이 죽은 이유에 부유한 사람들을 시기하여 공격하는 겁쟁이들의 소행으로 치부하는데 이는 정작 죽은 그들의 행동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 부유한 자들이 두려워 하는 이유에 불과하다. 진실과 상관없이 그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이유를 만드는 것은 마치 아서의 망상증과도 유사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왜 일까?

그렇게 아서를 태우고 가는 경찰차 바깥으로 보여지는 폭동에 의해 안전의 주체가 바뀌어버린 고담시를 보며 아서는 즐거워한다.

물론 그 회사원 3명이 죽을만큼 나쁜 짓을 한것이 아니다 라고 할 사람들은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아서를 두려워 하지 않았기에 거리낌 없이 아서를 괴롭힌 것도 사실이다. 죽을만큼 나쁜 짓인지 아닌지 그것은 아서에겐 주관적인 것이었다. 그가 말했던 코미디의 주관성처럼 그 세사람이 죽을만큼 나쁜 놈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철저하게 아서의 개인 문제다. 그리고 그것이 죽을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주관적인 입장이다. 그리고 이 둘을 나누는 것은 그것이 나의 일인가 나의 일이 아닌가 그것 뿐이다.


또한 아서는 극중에서 보여지는 모습만 보면 철저하게 선하게 행동하려 하는 착한 사람이었다. 게리를 놀릴때나 지하철에서 3명이 여자를 둘러 싸고 괴롭힐때도 적극적으로 막지는 못 했어도 그에게는 죄책감이 있었고, 어머니를 극진히 모시고, 노트에 적어 놓은 "정신질환의 가장 나쁜 점은 사람들 앞에서 아닌 척 해야 한다는 것이다" 처럼 그는 최소한 그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에게 정중했다. 하지만 그가 더이상 착해지기를 포기 했을 때 머레이쇼에서 말한 "아닌 척 하는 것도 지긋지긋하다"처럼 그는 그 누구보다 위험한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역으로 봤을 때 착한 아서를 기준으로 봤을땐 그를 둘러싸 린치를 가한 증권가 3인방은 아서의 목숨을 위협하는 위험한 사람이었고, 아서가 들고 있는 광고판을 부수고 아서를 공격한 불량 소년들은 아서의 생계를 공격했고, 아서의 영상을 틀어 공개적으로 망신을 준 머레이는 아서의 존엄성을 짓밟았고, 아서에게 학대를 가한 어머니는 아서의 미래를 망가뜨려 놨다. 결국 아서는 "내 죽음이 내 삶보다 가치 있기를"라는 극단적인 생각을 할 정도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도 몰리고 있었다. 조커가 되어버린 아서가 조커를 공격했던 사람들에게 위험한 사람이 된 것 처럼 아서를 공격했던 사람들 역시 아서에겐 위험한 사람들이었다. 단지 죽지 않을 정도로 간당간당하게 살아 있고, 자살을 생각하지만 거 봐 결국 안 했잖아 라고 하면 그만인걸까? 아서를 망가뜨린 책임을 나누면 기쁨이 배가 되기라도 하는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그들 역시 범죄자들이다. 단지 아서가 그들을 죽였기 때문에 모든 죄가 아서에게 돌아간 것 처럼 보일 뿐 아서를 망가뜨린 그들은 결국 그에 따른 결과를 맞이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머리속이 계산으로만 돌아가는 사람들이라면 수지타산이 맞지 않다고 여길 것이다. 걔넨 아서를 안 죽였는데 아서도 죽이면 안 되지 라고 말이다. 그러나 아서가 죽었다면 아서는 복수가 가능 했을까? 복수라는 것 자체가 가능 했을까? 랜든을 죽이고 난 뒤 아서는 게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괜찮아. 게리. 가도 돼. 나한테 잘 해 준건 너 뿐이었어" 게리는 아서의 복수의 대상에 들어가 있지 않았다. 게리는 아서를 망가뜨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지타산적으로 손해를 보고 싶지 않았다면 죽지 않을 만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괴롭히지 않아 게리처럼 복수를 당할 가능성을 0으로 만들었어야 했다.


그리고 아서의 증상이 악화되기 시작하는 것은 아서를 향한 긍정적인 관심이 없어지면서 였다. 정신상담의는 아서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었고 심지어 사회적 지원이 끊겨 약까지 끊기고, 입양된 아서가 학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알지 못 했고, 그가 불량 소년들에게 당한 일을 사장이 관심 없어 하고, 그에게 총을 준 것을 랜든이 모른체 하고, 어머니는 아서가 코미디언이 되겠다는 말에 부정적인 태도로 일관하며 토마스 웨인에게만 집중하고 아서에겐 무관심하며, 토마스 웨인은 주관적인 해석으로 광대라는 롤에 감추어진 아서를 겁쟁이로 일축하며, 경찰 또한 아서를 조롱했고, 동경의 대상이던 머레이는 정작 그를 조커라고 불렀던 것에 대해 아무런 기억이 없었다. 반면 아서가 죽인 3명에 대한 것이 언론을 통해 점점 부풀려지며 시위대가 생길 정도로 아서의 부정적인 행위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자 아서는 이에 대해 반응을 하게 되고 이는 아서를 안 좋은 쪽으로 바꿔놓게 만든다.


내가 너무 아서를 두둔하는 것 같지만 조커는 그저 결과일 뿐이다. 누구라도 될 수 있는 결과. 아서가 너무 특별해서가 아니다. 아서는 되려 너무나도 평범하다. 그와 같이 심각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더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모른다.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관심이 없기 때문에 설령 조커같은 사람이 더 등장하더라도 사람들은 조커 영화에서 보여진 것 처럼 악당이라 여겨지는 대상에게 그들만의 주관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이유를 억지로 만들어 낸다. 조커가 만들어진 과정. 최초의 살인을 하게 만든 3명의 행동에 대해서는 무시하듯 조커가 만들어진 과정에 대해서는 깊게 파고 들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시위를 주도하고 폭동을 일으킨 자들 역시 관심이 없다. 부유한 자들이 아서의 행동을 부유한 자에 대한 겁쟁이 같은 행동이라 하듯, 폭도들은 부유한 자들을 대상으로 공격을 시작한다. 결국 고담에서 아서는 사라지고 조커만이 남았다.




그러나 이런 생각도 틀렸을 수가 있다. 영화가 다분히 해석을 모호하게 하게끔 아서의 망상과 정신병원씬을 통해서 정확하게 이야기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모호함이 다른 의견을 만들고, 그렇게 생각을 하게끔. 아서같은 사람이 조커가 되지 않을 수 있게끔 사람들이 생각 할 거리를 던진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매우 특별하다.


이 영화는 조커라는 캐릭터와 배트맨이라고 하는 장르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다. 지금까지 보여진 조커라고 하는 캐릭터와도 배트맨이라고 하는 영화가 내세운 의미와도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름에도 불구하고 매우 적나라하게 조커다움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킬링 조크에서 조커는 누구나 타락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다크 나이트에서는 조커가 보여주고 싶었던 인간은 악하다는 점을 선박 폭파에서 실패했으나, 정작 조커 영화에서는 고담 시민 모두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이기주의로 똘똘 뭉쳤음을 보이고 있기에 기존의 배트맨 시리즈와는 전혀 다르기에 괴리감만 느껴진다. 다크 나이트에서 보여주었던 시민들의 선한 모습은 대체 조커 영화에서는 어디에 갔는가? 그래서 배트맨 시리즈와는 너무나도 다르다. 배트맨 영화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테러와 같은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항상 선하게 행동하려 한다는 것이겠지만, 이 영화는 조커라고 하는 캐릭터의 탄생을 보여주기 위해 모두가 악한 조커만큼이나 악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허나 이 영화가 말도 안 된다는 느낌이 없는 것은 이 영화에서 보여지는 고담 시민들의 악이 너무나도 가깝기 때문이다. 다크나이트에서 보여주었던 선보다도 더 와닿는 거리감이 짧은 악이기에 아서에게 공감하게 만든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볼 때 기존의 배트맨 시리즈를 생각하면 안 된다. 연결이 안 되기 때문이다. 또한 기존의 조커의 롤을 염두해도 안 된다. 이는 사람이 타락해 가는 과정에서 결과가 조커라는 이미지를 쓰고 있을 뿐, 기존의 배트맨 영화에서 보여지는 조커의 밑도 끝도 없는 광기와는 절대적으로 대치된다. 기존의 조커들의 광기에서는 이유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조커의 행위는 절대적으로 테러로서 다가오며, 공포스러운 반면 이 조커 영화에서 보여지는 아서 플렉은 너무나도 인간적이고, 이유없는 공격이 아니기에 이를 공포로서 받아들이는 것은 아서의 행위를 이해 하느냐 이해 못 하느냐로 나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조커의 행위를 이해 할 수도 없었고, 이해 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아서의 행위를 이해하려 하지 않으면 최소한 그 행위가 왜 어떤 과정을 통해서 발생했는지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면 영화 자체가 무용스러운 것이 되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조커와는 완전히 이질적이게 된다. 물론 이 또한 엔딩씬에서의 연출로 인해 그리고 아서의 망상증으로 인해 확신 할 수 없다. 특히 아서의 망상증을 이렇게 밀도있게 표현한 것은 이 영화가 처음이기에 너무나도 조커스럽다. 모든 배트맨 시리즈에서 밥먹듯이 거짓말을 한 조커는 그 거짓말이 진짜인지 아닌지 의문을 표할 필요가 없었다. 킬링 조크에서 보여지는 조커의 과거나 다크 나이트에서 말한 조커와 아내와의 관계나 하나 같이 그것이 사실이어도 상관 없고 거짓이어도 상관 없는 이야기들 뿐이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아서 플렉의 망상증은 아서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과 녹아들어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를 항상 의심하게 만든다. 진실인지 거짓인지를 의심하게 만드는 그러한 혼돈, 혼란스러움, 정말이지 조커 그 자체의 심연을 들여다 보게 만든 가장 조커 다운 조커였다.



하지만 그 망상증에 의해서 이 영화는 이해를 하기 힘들게 만들고, 그러한 이해의 거리감과 더불어 아서라고 하는 캐릭터가 받는 시달리는 고통과 환경 역시 이를 이해 할 수 있는 사람과 이해 못 하는 사람으로 나뉘며 점점 이해의 영역이 달라지게 된다. 심지어 미국의 총기 소지와 폭동은 한국인으로서는 이해 하기 힘든 점도 있을 것이다. 더더욱이 월드컵 때 자동차 위에서 난동을 피운 정도 외에는 딱히 폭동다운 폭동도 없었던 한국으로서는 미국의 폭동현상을 이해 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여러 이유 때문에 이 영화가 그만큼 논란이 되고 있고 많은 말이 오가고 있다. 그러나 각각의 이야기를 보다 보면 어느 정도 공통점이 보인다. 누구는 조커가 되기 전의 아서 플렉을 보고, 누구는 아서 플렉을 한참 지나친 조커를 본다. 누구는 미친 사람이 날뛰는 영화라고 하고, 누구는 사회가 만든 괴물이라고 본다. 결국 서로 보고 싶은 영역만 따로 떼어놓고 본다. 참으로 교묘한 영화다. 망상증만 아니었다면 이렇게 나뉘지도 않았을텐데.

하지만 개인적으로서 이 영화를 그저 미치광이가 날뛰는 불쾌한 영화라고 생각하거나 코스플레이나 하며 유희적 소모거리로 취급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영원히 이해 못 할 거라고 본다.

너는 조커가 되기 전의 아서 플렉을 경험 한 적이 없을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