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3월에 도진 적금깨기 병이 할머니한테 도지고 내가 노발대발해서 막아 놓으니까 그게 8월달에 또 터질까 말까 하다가 이제는 어제 또 터질라고 지랄을 한다.
아파트 갱신계약 가능한 날짜가 오늘까지인데 했냐고 물으니까 몰라 몰라 이 지랄을 한다. 작은 아빠에게 물어 본다고 하는데 정작 그 인간은 나몰라라 상태인데 책임감 없는 두 인간이 서로에게 묻는 꼬라지를 보느니 그냥 서류뭉치를 확인 했다. 없다. 관리사무소로 알아보러 갔다. 갱신 계약 안 했댄다. 돌아버린다.
돈은 냈는데 갱신계약은 시간을 두고 해야 하는거라 고새 까먹어서 그냥 세월아 네월아 나몰라라 이 지랄을 한다. 그래서 끌고 와서 갱신계약을 해 놓았다. 그나마 이 집안에서 제정신 박힌 인간이 있고, 그게 나라는 점이 나에겐 불행 중 다행이지만 불행 중 불행이다. 내가 안 움직이면 이 정신나간 병신들은 뭘 할 생각을 안 한다. 하지만 내가 나이가 어리니까 항상 내 의견은 묵살되곤 한다. 이런 말도 안 들어 쳐 먹는 병신들을 관리해야 하는 권리 없는 관리자 입장은 좆같다.
갱신계약 하고 나서는데 할망구는 또 다른데 정신 팔린다. 방금 전까지 심각하게 일을 처리 했는데도 이 인간 정신 상태는 딴 세상이다. 데드풀 머리통도 이 정도로 비정상이진 않을거다.
할아버지가 살아 생전 할머니를 볼 때 마다 하던 소리가 있다. 에휴. 에휴.
근데 이젠 내가 한다. 볼때마다 에휴 에휴 한다. 한심해서다. 그런데 말도 안 들어 먹어서 답답해서다.
할아버지가 살아 생전 이해를 못 해드린게 너무 죄송스럽다. 그렇게 권리 없는 관리자 역을 맡으셨던 할아버지는 이 머저리같은 할망구를 보면서 속이 무던히도 썩었을 것이다. 그것을 보면서도 멍청한 제 3인칭 관찰자 참견꾼 마냥 그냥 이해하세요 냅두세요 하던 나는 마찬가지로 병신이나 다름 없었다. 어때? 이제 니 차례가 되었다. 이해가 되냐? 내가 나에게 묻는다.
온갖 픽션에서 볼 수 있는 병신들의 집합체 요소를 할머니는 가지고 있다. 멍청하고 정신이 딴데 가 있고, 근거 없는 자신감에 남의 말은 안 들어 먹으면서 자신의 말은 항상 옳다고 생각하고 더불어 자기한테 관심도 없는 인간에게 온갖 공을 쏟는 호구력까지 갖추고 있다. 그리고 항상 곁에 있는 아군보다 멀리 있는 자신을 속여 먹는 인간들을 더 신뢰하는 이상한 쪽에 붙는 특성까지 있다. 노인들 상대로 떴다방에 가서 속아 넘어간게 한둘이 아닌데 그거 뜯어 말리러 온 친척보다 멀리서 전화로만 네네 하며 할머니 듣기 좋은 소리만 하는 인간들을 더 신뢰하던 인간이다. 귀가 안 들려서 친척이 보청기를 맞춰 줬는데 시끄럽다고 안 쓴다. 고치랬는데 가기 귀찮댄다. 걍 버려 버릴까? 이 지랄을 한다. 그래놓고 안 들려서 생기는 문제는 니가 잘 들리게 말하면 될거 아니냐 이 지랄이다. 그래서 내 목이 쉬었다. 누군가가 병신인걸 맞춰주기에 누군가는 또 다른 병신이 되는 것에 관심이 없는 인간이다. 오로지 자기 위주인 인간이다. TV불륨은 늘 최고치다. 그 바톤을 저녁에 이어 받는 인간도 마찬가지. TV를 그렇게 큰 소리로 켜 놓고 자는게 가능한 병신. 그 부모에 그 자식이다. 이웃에 민폐가 되는 것에 신경 쓰는 것은 오로지 나 혼자 뿐.
세상은 넓고 병신은 많지만 내 곁에 있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모든 사람의 바램이다. 난 정말 대다수의 사람들보다 더 끔찍하게 살아간다고 자부 할 수 있는 것이 이 할머니 때문이다.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이 할머니가 하는 짓거리는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마치 재롱같아서 주변 사람들이 항상 하하 웃는다. 그런데 정작 가족으로서 바라보면 이 할머니가 하는 짓거리는 온갖 짜증거리에 쓸모없는 짓거리 뿐이다. 쓸모없이 돈을 낭비하고 버리고 항상 자기만 옳다고 주장하고 자기 고집만 내세운다. 그게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무척 재밌어 보이나 보다. 그래서 난 항상 강력하게 주장 할 수 있는 것이 한가지 있다.
겪어 보지 않는 니들은 절대 이해하지 못 할 거라고. 웃으면서 다가와 남을 이해한다고 하는 새끼들은 전부 위선자 새끼들 뿐이다. 결코 니들은 그런 일을 겪어 본 적이 절대 없어.
대다수의 사람들은 행복한 편이다. 그렇게 생각한다. 행복은 주관적이라 절대적인게 없다고는 하나, 이런 꼴을 겪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거다.
나도 내 행복 찾고 싶다. 솔직히 길거리에서 얼어 뒤져도 그냥 따로 나가 살고 싶다. 그러나 그렇게 못 한다. 만약 그랬으면 오늘 갱신계약 최종날짜까지 이 머저리들은 아무것도 안 하고 살았을 거다. 그래놓고 일 터지면 또 집이 한바탕 난리가 나고 권리 없는 관리자역을 떠넘긴 새끼들이 찾아와서 니가 돌봐주지 그랬냐 넌 왜 따로 나가 사냐 이 지랄을 하겠지. 어차피 그 새끼들 병신 새끼들인건 다 마찬가지이고 그걸 다 나한테 떠넘기면서 이렇다 할 힘도 안 주는 병신 새끼들인데 진짜로 인연을 끊지 않는 이상 이 병신 새끼들에게 또 시달릴 걸 생각하면 이건 마치 저주와도 같다. 진짜 친척 병신 새끼들은 꼬라지도 보기 싫고 그 새끼들이랑 아웅다웅 할 걸 생각하면 분명 스트레스가 극도에 달해 빡쳐서 칼을 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냥 씨발 참고 말지 라는 걸로 귀결된다. 그러다 진짜 속병 나면 아버지 할아버지 마냥 뒤지겄지. 죽고 난 뒤 영혼이 있으면 그 꼬라지 보며 웃기라도 해야 겠다.
세상에 정말 영혼이 있고 천국 지옥이 있으면 난 자진해서 지옥에 가고 저 할망구랑 병신같은 친척들은 천국에 가길 바란다. 왜냐? 나만 당하긴 싫거든. 위선자가 아닌 정말 천사같은 인간들이라면 저 병신들을 받아 줄 수 있겠지. 그리고 나는 존나 나쁜 새끼니까 현세에서 꾹꾹 참고 못 했던 거 지옥에서 원없이 깽판이나 치고 말아야지.
2018년 10월 31일 수요일
성장형 주인공과 완성형 주인공에 대한 생각
주관적인 관점에서의 분석이고, 여기서 서술하는 것에서는 일반적인 것들에 대해서만 거론한다. 예컨데 대부분의 작품은 선을 행하는 히어로에 대한 이야기인데 간혹 등장하는 악을 지향하는 주인공이 있는 작품도 있다 라던지 식으로의 예외적인 케이스는 모조리 배제. 라고 하려고 했는데 퇴고를 하다 보니 거론 해 버렸네...
일단 그 둘에 대한 설명은 패스한다. 이 둘을 설명하는 것 처럼 의미가 없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다만 완성형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구분 하자면 완성형 캐릭터는 두 종류가 있는데 완성형이라는 의미처럼 기본적으로 주어진 능력 이상으로 성장을 안 하는 캐릭터를 바탕으로 두가지 형태의 스토리텔링 구조가 있다. 하나는 주인공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의 능력을 지닌 적들이 떼거지인 경우와 다른 하나는 주인공보다 강한 존재가 거의 없거나 비슷한 수준에서 머무르는 정도인 경우다. 전자의 경우처럼 까다로운 경우는 없다. 기본적으로 매체는 카타르시스를 제공해야 하는데 주인공이 완성형이라 한들 적도 그만큼 강하다면 거진 체스를 하는 느낌처럼 공방전이 치밀하고 섬세하게 오고가야 한다. 그만큼 설정도 잘 짜야 하고 작가의 전개 능력을 크게 구애받는다. 반면 후자의 경우에는 그런 섬세함이 그다지 필요가 없다. 필요한건 완성형 주인공이 힘을 얼마만큼 보여주느냐 하는 것이다. 어설프게 져준다거나 비등하게 맞춰준다거나 하는 식으로 찌질한 모습을 보여주면 그만큼 맥 빠지는 일도 없다. 이 글에서 이야기 하는 완성형은 후자를 기준으로 이야기 한다.
최근의 서브컬쳐계에서는 성장형 캐릭터의 흔적이 점차 줄어들고 완성형 캐릭터의 투입이 유독 자주 보이곤 한다. 이세계물의 범람처럼 주인공이 특별한 능력을 얻고, 이세계에서 잘 나가는 모습을 보이는 것. 사실 이것처럼 훌륭한 자위용 컨텐츠가 없다. 강한 캐릭터가 준비되어 있고 독자는 기분만 그 캐릭터에 맞춰 동화시키면 된다.
사실 성장형 캐릭터가 그다지 감정이입에 훌륭한 도구는 아니긴 하다. 아무리 성장형 캐릭터가 좋다 한들 아무 능력도 없는 상태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는다. 그 캐릭터가 특별한 능력을 얻고 성장의 가능성이 펼쳐 졌을 때 비로서 그 캐릭터에게 발산되는 감정이 무럭무럭 솟아난다.
성장형 캐릭터는 기본적으로 선을 지향하고, 사회에 동화되길 원하며, 성장하는 과정에서 보여지는 찌질함 내지는 부족한 부분을 필히 독자로 하여금 알 수 있도록 전개해야 한다. 그런데 그 찌질함 내지는 부족한 부분은 다른 말로 하면 컴플렉스이고 이 컴플렉스라고 하는 것은 잘못 건드리면 반발을 사기도 쉽다. 사회에서 언급하는 것을 금기시 되는 컴플렉스는 기본이요 컴플렉스의 발산 방향도 중요하다. 그래서 성장형 캐릭터는 완성형 캐릭터에 비해 바로 감정을 쏟기가 까다롭다. 그 캐릭터가 충분히 익고 독자가 충분히 마음을 쏟을 만하다 여겨질때야 비로서 열렬한 사랑을 받게 된다.
하지만 완성형 캐릭터는 그와 다른데 완성형 캐릭터는 성장을 끝마친 모습처럼 매우 전문적이고 익숙한 모습을 보인다. 따라서 찌질함 내지는 부족한 부분인 컴플렉스가 거의 없다. 심지어 상황에 따라서는 너무 사회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서 염세적인 모습을 보이거나 사회의 평판에 대해 별 관심이 없기도 한다. 자신의 힘을 스스로 경계하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칠까 거리를 두기도 하고, 따라서자연스레 혼자 있는 것을 선호하는 케이스가 많다. 그리고 그들이 가진 힘이 악에 속해 있거나, 혹은 그 악 자체를 상징하거나 그러한 평판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다. 성장형 캐릭터와는 정 반대다. 그리고 그 둘은 서로 상반되어 어울리지 못 한다.
성장형 캐릭터의 결말은 정해져 있다. 사실 성장형 캐릭터의 최종적인 결말은 매우 뻔하게도 선을 지향하여 악을 물리치고 가장 강한자가 되어 세상의 평화를 가져다 주는 것이다. 따라서 결말이 빤히 보이는 성장형 캐릭터의 즐거움은 결말이 아닌 주인공을 압도하는 적의 세력을 물리치며 성장하는 과정이 가장 재미있다. 이 경우는 주인공도 적도 매력적으로 다가 올 수 있어야 한다.
반면 완성형 캐릭터는 그렇지 않다. 완성형 캐릭터는 그에게 주어진 강한 힘을 어디에 쓸 것인가 하는 자유도에 재미가 있다. 그가 가진 힘을 막아 설 자가 극히 적으므로 누가 적이 될 것인지 어떤 존재들이 적대 세력이 될 것인지는 그리 흥미롭지 않다. 완성형 캐릭터 매체가 가진 장점은 그가 가진 과도할 정도로 강한 힘과 대비되는 제약 사이에서 고뇌하던 주인공이 봉인을 풀고 압도적인 힘을 쏟아내어 그를 막아서는 적들을 날려버리고 그가 선택한 길의 형태를 즐기는 것이다.
최근에 완성형 캐릭터의 투입이 늘어나고 있다 라고 했었는데 과거나 지금이나 완성형 캐릭터는 자주 사용되어지는 편이기는 하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별로 특이 할 점은 아니다.
그러나 완성형 캐릭터의 치명적인 위험은 잘못 하면 먼치킨물이 된다는 점이다. 주인공이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 주변 인물은 오오 그렇구나 하는 반응 측정기로 전락하는 경우다.
성장형 캐릭터에도 종종 주인공만 성장하고 동료는 들러리가 되어 버려 결국 작품 끝에서는 먼치킨 끝물을 보이는 경우가 있어 주의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 지만, 그나마 성장형의 경우에는 그에 걸맞는 적을 배치해야 하기에 고난과 역경이라는 점은 존재한다. 하지만 완성형 캐릭터의 경우에는? 완성형 캐릭터를 가로 막는 적은 그를 성장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완성형 캐릭터를 가로 막을 수준의 적이라는 점에서 완성형 캐릭터를 더더욱 먼치킨으로 전락시키는 악영향을 줄 수 있다.
주인공이 먼치킨이 될 경우의 가장 안 좋은 예는 바로 슈퍼맨이다. 엄밀히 말해서 슈퍼맨 자체가 잘못인 경우는 없다. 이는 창작자가 슈퍼맨을 메리수로 받아 들였을 때의 문제다.
알다시피 슈퍼맨이라고 하는 캐릭터는 거진 결점이 없는 완전무결한 캐릭터다. 시리즈마다 다르지만 지능이 어지간한 히어로 뺨칠만큼 좋게 나오는 경우도 있고, 그의 능력이 모든 히어로를 쌈싸먹는 경우도 허다하다. 다만 이렇게 메리수가 되어 버릴 경우, 그 이외의 캐릭터를 사랑하던 사람들에게는 박탈감을 준다. 전혀 조화를 이루지 못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대체로 이러한 슈퍼맨에게 약점을 부여하기 마련인데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크립토나이트. 하지만 이 전개도 사실 따분하기가 그지없다. 약점 하나만 파고 들기 때문에 오히려 이 크립토나이트에 번번히 털리면 그거 막을 생각 안 하고 뭐하고 있냐 라는 핀잔을 듣기 좋기 때문. 그렇기 때문에 더 머리가 좋은 자를 내보내기 위해 지능을 너무 좋게는 하지 않게 하거나, 혹은 슈퍼맨의 물리력으로 막아낼 수 없는 능력을 쓰는 자가 나타나거나 하는 일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불살주의 같은 것은 시시할 정도로 넘쳐나는 설정이기도 하다.
문제는 그거다. 불살주의가 아닌 경우. 즉 악당같은 주인공을 전면에 내세웠을 때 완성형 캐릭터는 작가가 리미터 제한을 염두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는 처음에는 호쾌하게 느껴졌을지 몰라도 작가의 성향에 의해 의도된 전개이므로 이후에도 계속 같은 식의 전개가 펼쳐지는 일이 다분하다. 즉 작품의 굴곡이 없어진다. 앞서 말했듯이 완성형 캐릭터는 제약을 통해 그 가진 힘을 제한하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메리수에 빠진 완성형 악역 주인공은 리미터 제한을 하지 않으므로 힘을 숨겨두었다가 발산하는 전개가 되질 않으니 가지고 있는 전력을 초중반에 다 펼쳐 버리게 된다. 가지고 있는 패가 로얄 스트레이트 플러시라고 초반부터 올인하는 꼴이다. 하지만 이미 패를 다 읽힌 상황에서 과연 상대가 걸려들까? 독자도 마찬가지. 독자도 가진 카드를 다 내보인 작품에 대해서는 흥미를 잃고 만다. 완성형 캐릭터가 성장형 캐릭터보다 안 좋은 이유가 이것이다. 성장형 캐릭터는 스테이터스가 밑에서 위로 치고 올라가는 것이지만, 완성형 캐릭터는 위에서 고정되어 있다. 이 스테이터스를 작품 내에서 분위기에 따른 굴곡에 맞추려면 당연히 어떠한 제약이나 사건이 있어야 하는데 이는 단순히 성장형에게 적당한 적을 주는 것 보다도 더 까다롭다. 그야 완성형 캐릭터는 이미 쓰러뜨리고도 남을 힘이 있는데 왜 쓰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한 확실한 이유가 기반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지간히 이야기를 전개하는 실력이 좋지 않은 이상 완성형 캐릭터의 사용은 숙고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이런 성장형과 완성형을 섞어서 하나의 캐릭터에 집어 넣은 경우도 있다. 드문 케이스이긴 한데 대표적으로는 완전 성장 했을 때의 모습을 암시하는 형태다. 그러나 그것을 은유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대부분은 사람들의 기대를 자극하면서 완성형이 되었을 때의 모습을 기대하기 마련인데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의 경우에는 그러한 신비주의를 때려치고 첫판부터 롤 모델의 모든 모습을 보여 준 뒤, 후계자를 골라 성장형이 가야 할 최종 목표를 다 보여주고 말았다. 이는 정말로 알고보니 숨겨진 능력을 되찾았더라 식의 전개가 아닌 이상 심각한 전개의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최종형태는 결국 올마이트가 될 것이고, 원포올의 선대 능력을 이어받는다는 점에서 미도리야가 가진 힘은 올마이트보다 쪼끔 더 나은 정도에 그칠 것이기에 초반에 보여주었던 올마이트 이상 가는 적이 나와서도 문제고, 올마이트를 뛰어넘는 힘을 보여주어도 문제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특히 성장형과 완성형 중간에 있는 미도리야 캐릭터는 완성형이 가진 힘을 제약하여 스스로를 옭아매는 전개도 펼칠 수 없이 스스로가 부족한 캐릭터라 온 힘을 다해도 될까 말까이기 때문에 완성형이 가진 소재 사용의 수단도 대부분 막혀 있다.
더군다나 성장형의 문제점은 그가 온전한 모습으로 바라던 바를 성취해야 한다는 점에서 파멸형으로 치달아서는 안 된다는 점인데, 히로아카의 주인공 미도리야는 너무 극단적으로 캐릭터를 파멸형으로 몰고 가는 형태를 띄고 있다. 이는 작가가 아슬아슬한 전개를 끌어내는 방법에 대해서 진지한 고찰이 없어 어설픈 형태에 의지하고 있는 모습이다. 물론 이미 이야기의 첫 시작에서 이야기를 과거형으로 읊는 모습을 보였으니 온전한 성장을 끝냈다는 결론이 나지만, 이 또한 성장형이 쉽사리 해서는 안 되는 성장형 캐릭터의 결말이 뻔하더라도 그 결말을 독자가 먼저 다 알아버리게 만들어서는 안 되는 일을 저질렀기에 히로아카는 성장형으로서도 완성형으로서도 첫판부터 독자의 흥미를 빼앗아 버린 것과 같다. 더군다나 성장형의 장점은 성장을 통해서 발전한 모습을 즐기는데에 있는데, 완성형의 롤모델이 떡하니 드러났기 때문에 성장한 모습에 대한 감흥이 이미 스포일러 되어 크게 와 닿지 않는 문제도 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히로아카가 아직까진 버티고 있으나 얼마나 버틸수 있을지, 혹은 성장형과 완성형을 섞어 만든 형태에서 발전이 가능한지 알고 싶기도 하다. 다만 히로아카의 가능성에 대한 기대 이건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사견이고, 엄밀히 말해서 이걸 혼용해서 사용하는 것은 절대 금해야 할 것이다. 최소한 쓰려면 완성형의 형태를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추상적으로 표현하여 독자의 궁금증을 불러 일으켜야 한다.
원래는 위쳐의 게롤트에 대해서 고찰하던 중 다른 완성형 캐릭터 중에서 오버로드의 모몬가라고 하는 완성형 캐릭터가 완성형 캐릭터로서의 매력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 그것을 판단하기 위해 분석하려던 것이었는데 생각 해 보면 오버로드가 흥하는 관점을 봤을 때 그건 완성형 캐릭터이기 때문인건 아닌 것 같다. 오버로드에서는 완성형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매력이 전혀 없다. 예컨데 헬싱의 아카드의 경우에도 악의 위치에 선 캐릭터지만 행동은 제약 받은 선의 입장이고, 오히려 대립하는 것은 신부들인 선의 위치의 종교측과 싸우기도 하고, 나치를 바탕으로 하는 악의 세력과도 싸우는데, 오버로드의 경우에는 그런 선에 관한 카타르시스가 없다. 작가는 뭐 이세계물의 무분별한 행동의 안티테제라고 말하긴 하는데 주인공에게 1인 2역을 하면서까지 그런 짓을 시키는 것 치고는 그다지 안티테제라는 느낌은 들지 않고 오히려 캐릭터 자딸에 가까운 느낌만 들고, 이세계 넘어와서 깽판치는 것을 통렬히 비판하고 싶었다 쳐도 모몬가라고 하는 캐릭터가 하는 짓은 대체 어떤 점을 비판하고 싶었는가를 알기가 어렵다. 또한 단순하게 생각해서 그에게 적대 할 만한 실력의 존재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과 더불어 설령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길드째로 전이된 상황에서 전력의 차가 현저하게 나기 때문에 대체 어떤 점에서 긴장감을 부여 하려고 하는 것인지를 알 수 없다.
결국 남는 것은 캐릭터가 펼치는 무쌍이나 감상하고 그 결과물 가지고 서로 우왕좌왕 하는 마치 원펀맨과 같은 상황인데 그렇다면 오버로드는 엄밀히 말해 완성형 캐릭터물로서는 최악의 형태이지만 성공한 형태일듯 싶다. 원펀맨은 최소한 그가 가진 힘을 적당히 쓰고, 건성이더라도 선을 행하지만 오버로드는 그게 아니니까. 그런데 엄밀히 말해 나는 원펀맨이 흥한 이유도 사실 이해가 안 가지만 오버로드가 흥한 이유는 더더욱 이해가 가질 않는 상황이다. 최소한 원펀맨의 사이타마는 강함에 대한 염세적인 반응과 동시에 강한 자를 찾는 욕구가 은연중에 나타나기에 작가가 생각한 강함에 대한 이미지를 생각 해 보려는 메세지는 전달 되는 반면 오버로드의 경우에는 작가가 말한 이세계 깽판물에 대한 안티테제로서의 메시지는 전혀 전달이 안 되기 때문이다. 이세계 깽판물이 가지는 모순을 드러내기 위한게 아니라 오버로드는 이세계 깽판물 그 자체가 되어 있는 상황이고, 일부러 싸움을 유도하여 수십 수만을 쳐 죽이는 상황에서 접수한 왕국의 국민들에게 따스한 꼴을 해 봐야 학살자라는 점에서는 변함 없는데 온갖 찬양이 돌아오는 상황에서 이걸 과연 안티테제는 고사하고 자캐딸 소설 그 이상이 될 수 있을지가 의문인 것이다.
앞서 말한 위쳐의 경우에는 위쳐라고 하는 직업 자체가 사람들에게 환대받지 못 하지만 사람들이 살기 위해선 위쳐에게 의뢰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고, 위쳐 또한 배운게 괴물 죽이는 짓이지만 리스크가 너무 크고, 괴물을 잡기 위해 준비하거나 먹고 살기 위해선 돈을 받아야 하는데 위쳐를 고깝게 보는 일반인들은 위쳐에게 어떻게든 돈을 안 내려고 바둥바둥 하는 상황에서 플레이어는 단순히 세상을 선과 악으로 나누어 한쪽만 바라보는게 아니라 그 둘을 바라보는 중립적인 느낌으로 진행되는데, 오버로드의 경우에는 이세계를 공격하는 측과 공격 당하는 측 그 둘을 동시에 보여주긴 하나, 엄밀히 말해 이걸 깊이감 있게 보여주거나 독자에게 생각 할 거리를 던져주는 형태는 아니다. 가만히 잘 살고 있었는데 멋대로 넘어온 놈들이 시비 털어서 유린하는 것을 바라보며 오오 최강 최고 이러는데 언뜻 보기에는 양측을 조명하는 것 같지만 엄밀히는 약탈하는 쪽을 일방적으로 치켜세우기에 무조건적인 한쪽 편들기 즉 자딸에 가깝다.
엄밀히 말해 안티테제가 되기 위해서는 테제인 기존 작품의 모순을 드러내야 하는데, 오버로드에서 보여주는 기존 작품의 모순이 없다. 오히려 테제 그 자체를 그대로 따라가는 형태에 가깝다. 그나마 팬덤이 클리셰 비틀기라 말하는 현대인 천재설을 비트는 입만 현자 같은 요소는 실제로 그걸 모순으로서 보여주는 형태도 아니고 클리셰 비틀기도 아니다. 그저 작가가 현대인이 이세계 가 봐야 할 수 있는게 없다 수준으로 부정하고 까내린 것 뿐이다. 애초에 마법이 존재하는데 현대인 천재론을 들이밀어 봐야 마법으로 때우면 그만인 상황에서 의미가 없다. 듣기로는 실제로도 입만현자가 말한 물건을 마법으로 구현했다 하니 오히려 이건 모순을 까려고 클리셰 비틀기를 한게 아니라 오버로드 작품 자체가 스스로 모순이 된 격이다. 현대인 천재론을 까기 위해서는 현대인의 지식이 그 시대에서 이미 더 효율적인 방식으로 가능하거나 아니면 아예 쓸모 없음을 입증해야 하는데, 그의 지식을 받아들여 사용하는 자가 나타나 버리게 되면 현대인 천재론은 유용한 것이 되어버린다. 예컨데 현대인이 이세계에 넘어가서 컴퓨터라는게 있습니다. 알맞은 소프트웨어가 있으면 계산도 손쉽게 하고 인터넷에 접속되면 아무리 먼 곳에 있는 사람하고도 연락을 할 수 있죠. 다만 모니터도 있어야 하고 전기도 통해야 하고 등등 이러다가 이세계인들에게 응? 우린 마법으로 멀리서도 연락을 주고 받는데? 전기? 마법으로 불러내면 되는데? 그냥 안 되고 발전기를 돌려야 해? 그럼 골렘 만들어서 돌리게 하지 뭐. 계산? 그냥 계산하면 되지 않나? 복잡한 수식을 계산하려면 필요하다고? 그럼 숫자판에 마법을 걸어서 수식 규칙대로 알아서 움직이게 해야 겠네 식으로 필요 없거나 그 이상의 방법이 있음을 증명하면 되는 것이다.
클리셰를 비틀어도 그걸 통쾌하게 비틀어야 인상이 남는 법이고 그러한 예시를 쓴 것이 최근에는 코노스바나 이세계가 게임이란건 나만이 알고 있다 라던지가 있고,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슬레이어즈의 리나 인버스처럼 완성형 주인공에 착하지도 않은, 그런 주제에 먹보 빈유 성깔 나쁨 등 그것이 오해에 오해를 불러 일으키고 마치 트라이건의 바슈처럼 인간재앙으로 불리며 그 시대 여주인공의 특징을 확 비틀어 버린 캐릭터였지만 엄청난 인기를 끌었었다.
그런데 오버로드는 그저 주인공측이 성질 나쁜 깽판깡패일 뿐이다. 클리셰 비틀기도 없고 일반적으로 느끼는 통쾌함도 없고, 결국 결론은 오버로드에서 보여지는 깽판이 소비자 층에게 먹혔다 정도 뿐이다. 솔직히 그런 오버로드에서 완성형 캐릭터의 완성도나 중요도를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다고 느끼게 된다. 참 아쉬운 일이긴 한데 이런 기형적인 상황도 가능하구나 하는 교훈 정도는 느꼈다.
생각 해 보면 소아온의 키리토도 초반엔 성장하는 척 했지만 결국 사냥터 독점으로 레벨업한 완성형 캐릭터로 끌고 나왔는데 이 역시도 딱히 완성형 캐릭터가 가지는 매력을 제대로 끌어내지는 못 했다. 메리수가 되어 버린 키리토 올인 체제에, 특히 초반의 사치 에피소드는 게임의 잔인함과 키리토의 암울한 과거를 새기고 솔로 플레이에 올인하게 하려던 목적이었겠지만 그냥 쿨병 종자가 쿨병짓 하다가 사람 죽게 만들었는데 혼자 알아서 극복 식이 되어버려 공감대도 얻지 못 했고, 혼자 존나 쩔게 강해서 멋진 척은 다 하는 그런 캐릭터였다. 신기하게도 양판소의 구성과 그다지 다를바 없었고 수천명의 목숨을 가지고 인질극한 정신나간 악역 미화 등 제대로 된 작품이라고는 보기 어렵지만 여전히 애니메이션은 계속 나오고 책도 계속 나오고 있다.
일본의 서브 컨텐츠 질적 하락은 잘 알려진 사실이긴 하지만 이렇게 보니 정말 심각하구나 하는 느낌이 든다. 물론 실력 좋고 작품성 좋은 것들도 흥행이 되긴 하지만 쿨병 걸린 학살종자 메리수 캐릭터가 각광을 받는다는 점에서 그만큼 자존감이 썩어서 대리만족이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것을 빠르게 실현 시켜 줄 수 있는 것이 완성형 캐릭터가 된 것이다.
하기사 최근에 방영하는 전생 슬라임도 결국엔 걍 메리수 캐릭터 자딸용이었고, 고블린 슬레이어도 레벨업 다 시켜 놓고 전장에 내보내는 완성형 캐릭터식이었다. 그나마 넷상에서 괜찮은 작품이다 라고 말하는 변경의 팔라딘도 정작 성장을 다 시켜 놓고 내보내는 식이었고. 근데 걔는 애니메이션화 되지 않은 것을 보니 성장에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면 인기가 없나보다.
확실히 완성형 캐릭터는 이미 완성되어 있기에 그냥 그대로 스토리를 풀어나가면 되는 반면 성장형 캐릭터는 찌질한 주인공이 완전체가 될 때 까지의 과정을 그려내야 해서 어지간한 인기를 끌지 못 하면 주목을 받지 못 하곤 한다. 예컨데 오리지널 에피소드까지 집어넣는 원피스나 나루토의 경우에는 엄청난 인기를 끌었기에 가능했지만 실제로 그런 성장형 주인공 애니메이션은 2쿨 이상을 넘기기가 어려운 것도 현실. 그렇다고 그렇게 1~2쿨로 끝내서 결말은 커녕 중간도 못 보여주면 애니화 한 의미도 없다. 즉 일본의 서브컬쳐 애니업계에 비상식적인 거품과 착취가 결국 좋은 작품을 롱런하기에 적합하지 않아 1~2쿨로 끝내도 전개에 차질이 없는 완성형 메리수 타입에 주목하게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완성형 캐릭터가 나쁘다는 것도 아니고 예컨데 혈계전선도 기본적으로는 완성형 캐릭터들이 무더기로 나와서 노닥거리는거지만 적절한 캐릭터성과 완성형 캐릭터가 가지고 있어야 할 점들을 갖춰 나름 인기를 끌었다. 문제는 질적 하락이 눈에 띄는 것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는 상황은 어째서 그딴게 상품이 되는거지? 라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수가 없는 것.
과연 지금처럼 일본 서브컬쳐가 완성형 자딸 메리수캐에 집착하면 혹시나 하는 생각이지만 한국 컨텐츠에 질적으로 밀려 순위가 바뀌는 상황이 올까 하는 기대도 들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워낙 쌓아놓은게 있는 일본이다 보니 그리 쉽게는 바뀌지 못 하겠지. 거기다가 한국 컨텐츠 시장의 문제점도 만만치 않으니....
일단 그 둘에 대한 설명은 패스한다. 이 둘을 설명하는 것 처럼 의미가 없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다만 완성형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구분 하자면 완성형 캐릭터는 두 종류가 있는데 완성형이라는 의미처럼 기본적으로 주어진 능력 이상으로 성장을 안 하는 캐릭터를 바탕으로 두가지 형태의 스토리텔링 구조가 있다. 하나는 주인공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의 능력을 지닌 적들이 떼거지인 경우와 다른 하나는 주인공보다 강한 존재가 거의 없거나 비슷한 수준에서 머무르는 정도인 경우다. 전자의 경우처럼 까다로운 경우는 없다. 기본적으로 매체는 카타르시스를 제공해야 하는데 주인공이 완성형이라 한들 적도 그만큼 강하다면 거진 체스를 하는 느낌처럼 공방전이 치밀하고 섬세하게 오고가야 한다. 그만큼 설정도 잘 짜야 하고 작가의 전개 능력을 크게 구애받는다. 반면 후자의 경우에는 그런 섬세함이 그다지 필요가 없다. 필요한건 완성형 주인공이 힘을 얼마만큼 보여주느냐 하는 것이다. 어설프게 져준다거나 비등하게 맞춰준다거나 하는 식으로 찌질한 모습을 보여주면 그만큼 맥 빠지는 일도 없다. 이 글에서 이야기 하는 완성형은 후자를 기준으로 이야기 한다.
최근의 서브컬쳐계에서는 성장형 캐릭터의 흔적이 점차 줄어들고 완성형 캐릭터의 투입이 유독 자주 보이곤 한다. 이세계물의 범람처럼 주인공이 특별한 능력을 얻고, 이세계에서 잘 나가는 모습을 보이는 것. 사실 이것처럼 훌륭한 자위용 컨텐츠가 없다. 강한 캐릭터가 준비되어 있고 독자는 기분만 그 캐릭터에 맞춰 동화시키면 된다.
사실 성장형 캐릭터가 그다지 감정이입에 훌륭한 도구는 아니긴 하다. 아무리 성장형 캐릭터가 좋다 한들 아무 능력도 없는 상태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는다. 그 캐릭터가 특별한 능력을 얻고 성장의 가능성이 펼쳐 졌을 때 비로서 그 캐릭터에게 발산되는 감정이 무럭무럭 솟아난다.
성장형 캐릭터는 기본적으로 선을 지향하고, 사회에 동화되길 원하며, 성장하는 과정에서 보여지는 찌질함 내지는 부족한 부분을 필히 독자로 하여금 알 수 있도록 전개해야 한다. 그런데 그 찌질함 내지는 부족한 부분은 다른 말로 하면 컴플렉스이고 이 컴플렉스라고 하는 것은 잘못 건드리면 반발을 사기도 쉽다. 사회에서 언급하는 것을 금기시 되는 컴플렉스는 기본이요 컴플렉스의 발산 방향도 중요하다. 그래서 성장형 캐릭터는 완성형 캐릭터에 비해 바로 감정을 쏟기가 까다롭다. 그 캐릭터가 충분히 익고 독자가 충분히 마음을 쏟을 만하다 여겨질때야 비로서 열렬한 사랑을 받게 된다.
하지만 완성형 캐릭터는 그와 다른데 완성형 캐릭터는 성장을 끝마친 모습처럼 매우 전문적이고 익숙한 모습을 보인다. 따라서 찌질함 내지는 부족한 부분인 컴플렉스가 거의 없다. 심지어 상황에 따라서는 너무 사회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서 염세적인 모습을 보이거나 사회의 평판에 대해 별 관심이 없기도 한다. 자신의 힘을 스스로 경계하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칠까 거리를 두기도 하고, 따라서자연스레 혼자 있는 것을 선호하는 케이스가 많다. 그리고 그들이 가진 힘이 악에 속해 있거나, 혹은 그 악 자체를 상징하거나 그러한 평판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다. 성장형 캐릭터와는 정 반대다. 그리고 그 둘은 서로 상반되어 어울리지 못 한다.
성장형 캐릭터의 결말은 정해져 있다. 사실 성장형 캐릭터의 최종적인 결말은 매우 뻔하게도 선을 지향하여 악을 물리치고 가장 강한자가 되어 세상의 평화를 가져다 주는 것이다. 따라서 결말이 빤히 보이는 성장형 캐릭터의 즐거움은 결말이 아닌 주인공을 압도하는 적의 세력을 물리치며 성장하는 과정이 가장 재미있다. 이 경우는 주인공도 적도 매력적으로 다가 올 수 있어야 한다.
반면 완성형 캐릭터는 그렇지 않다. 완성형 캐릭터는 그에게 주어진 강한 힘을 어디에 쓸 것인가 하는 자유도에 재미가 있다. 그가 가진 힘을 막아 설 자가 극히 적으므로 누가 적이 될 것인지 어떤 존재들이 적대 세력이 될 것인지는 그리 흥미롭지 않다. 완성형 캐릭터 매체가 가진 장점은 그가 가진 과도할 정도로 강한 힘과 대비되는 제약 사이에서 고뇌하던 주인공이 봉인을 풀고 압도적인 힘을 쏟아내어 그를 막아서는 적들을 날려버리고 그가 선택한 길의 형태를 즐기는 것이다.
최근에 완성형 캐릭터의 투입이 늘어나고 있다 라고 했었는데 과거나 지금이나 완성형 캐릭터는 자주 사용되어지는 편이기는 하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별로 특이 할 점은 아니다.
그러나 완성형 캐릭터의 치명적인 위험은 잘못 하면 먼치킨물이 된다는 점이다. 주인공이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 주변 인물은 오오 그렇구나 하는 반응 측정기로 전락하는 경우다.
성장형 캐릭터에도 종종 주인공만 성장하고 동료는 들러리가 되어 버려 결국 작품 끝에서는 먼치킨 끝물을 보이는 경우가 있어 주의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 지만, 그나마 성장형의 경우에는 그에 걸맞는 적을 배치해야 하기에 고난과 역경이라는 점은 존재한다. 하지만 완성형 캐릭터의 경우에는? 완성형 캐릭터를 가로 막는 적은 그를 성장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완성형 캐릭터를 가로 막을 수준의 적이라는 점에서 완성형 캐릭터를 더더욱 먼치킨으로 전락시키는 악영향을 줄 수 있다.
주인공이 먼치킨이 될 경우의 가장 안 좋은 예는 바로 슈퍼맨이다. 엄밀히 말해서 슈퍼맨 자체가 잘못인 경우는 없다. 이는 창작자가 슈퍼맨을 메리수로 받아 들였을 때의 문제다.
알다시피 슈퍼맨이라고 하는 캐릭터는 거진 결점이 없는 완전무결한 캐릭터다. 시리즈마다 다르지만 지능이 어지간한 히어로 뺨칠만큼 좋게 나오는 경우도 있고, 그의 능력이 모든 히어로를 쌈싸먹는 경우도 허다하다. 다만 이렇게 메리수가 되어 버릴 경우, 그 이외의 캐릭터를 사랑하던 사람들에게는 박탈감을 준다. 전혀 조화를 이루지 못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대체로 이러한 슈퍼맨에게 약점을 부여하기 마련인데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크립토나이트. 하지만 이 전개도 사실 따분하기가 그지없다. 약점 하나만 파고 들기 때문에 오히려 이 크립토나이트에 번번히 털리면 그거 막을 생각 안 하고 뭐하고 있냐 라는 핀잔을 듣기 좋기 때문. 그렇기 때문에 더 머리가 좋은 자를 내보내기 위해 지능을 너무 좋게는 하지 않게 하거나, 혹은 슈퍼맨의 물리력으로 막아낼 수 없는 능력을 쓰는 자가 나타나거나 하는 일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불살주의 같은 것은 시시할 정도로 넘쳐나는 설정이기도 하다.
문제는 그거다. 불살주의가 아닌 경우. 즉 악당같은 주인공을 전면에 내세웠을 때 완성형 캐릭터는 작가가 리미터 제한을 염두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는 처음에는 호쾌하게 느껴졌을지 몰라도 작가의 성향에 의해 의도된 전개이므로 이후에도 계속 같은 식의 전개가 펼쳐지는 일이 다분하다. 즉 작품의 굴곡이 없어진다. 앞서 말했듯이 완성형 캐릭터는 제약을 통해 그 가진 힘을 제한하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메리수에 빠진 완성형 악역 주인공은 리미터 제한을 하지 않으므로 힘을 숨겨두었다가 발산하는 전개가 되질 않으니 가지고 있는 전력을 초중반에 다 펼쳐 버리게 된다. 가지고 있는 패가 로얄 스트레이트 플러시라고 초반부터 올인하는 꼴이다. 하지만 이미 패를 다 읽힌 상황에서 과연 상대가 걸려들까? 독자도 마찬가지. 독자도 가진 카드를 다 내보인 작품에 대해서는 흥미를 잃고 만다. 완성형 캐릭터가 성장형 캐릭터보다 안 좋은 이유가 이것이다. 성장형 캐릭터는 스테이터스가 밑에서 위로 치고 올라가는 것이지만, 완성형 캐릭터는 위에서 고정되어 있다. 이 스테이터스를 작품 내에서 분위기에 따른 굴곡에 맞추려면 당연히 어떠한 제약이나 사건이 있어야 하는데 이는 단순히 성장형에게 적당한 적을 주는 것 보다도 더 까다롭다. 그야 완성형 캐릭터는 이미 쓰러뜨리고도 남을 힘이 있는데 왜 쓰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한 확실한 이유가 기반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지간히 이야기를 전개하는 실력이 좋지 않은 이상 완성형 캐릭터의 사용은 숙고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이런 성장형과 완성형을 섞어서 하나의 캐릭터에 집어 넣은 경우도 있다. 드문 케이스이긴 한데 대표적으로는 완전 성장 했을 때의 모습을 암시하는 형태다. 그러나 그것을 은유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대부분은 사람들의 기대를 자극하면서 완성형이 되었을 때의 모습을 기대하기 마련인데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의 경우에는 그러한 신비주의를 때려치고 첫판부터 롤 모델의 모든 모습을 보여 준 뒤, 후계자를 골라 성장형이 가야 할 최종 목표를 다 보여주고 말았다. 이는 정말로 알고보니 숨겨진 능력을 되찾았더라 식의 전개가 아닌 이상 심각한 전개의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최종형태는 결국 올마이트가 될 것이고, 원포올의 선대 능력을 이어받는다는 점에서 미도리야가 가진 힘은 올마이트보다 쪼끔 더 나은 정도에 그칠 것이기에 초반에 보여주었던 올마이트 이상 가는 적이 나와서도 문제고, 올마이트를 뛰어넘는 힘을 보여주어도 문제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특히 성장형과 완성형 중간에 있는 미도리야 캐릭터는 완성형이 가진 힘을 제약하여 스스로를 옭아매는 전개도 펼칠 수 없이 스스로가 부족한 캐릭터라 온 힘을 다해도 될까 말까이기 때문에 완성형이 가진 소재 사용의 수단도 대부분 막혀 있다.
더군다나 성장형의 문제점은 그가 온전한 모습으로 바라던 바를 성취해야 한다는 점에서 파멸형으로 치달아서는 안 된다는 점인데, 히로아카의 주인공 미도리야는 너무 극단적으로 캐릭터를 파멸형으로 몰고 가는 형태를 띄고 있다. 이는 작가가 아슬아슬한 전개를 끌어내는 방법에 대해서 진지한 고찰이 없어 어설픈 형태에 의지하고 있는 모습이다. 물론 이미 이야기의 첫 시작에서 이야기를 과거형으로 읊는 모습을 보였으니 온전한 성장을 끝냈다는 결론이 나지만, 이 또한 성장형이 쉽사리 해서는 안 되는 성장형 캐릭터의 결말이 뻔하더라도 그 결말을 독자가 먼저 다 알아버리게 만들어서는 안 되는 일을 저질렀기에 히로아카는 성장형으로서도 완성형으로서도 첫판부터 독자의 흥미를 빼앗아 버린 것과 같다. 더군다나 성장형의 장점은 성장을 통해서 발전한 모습을 즐기는데에 있는데, 완성형의 롤모델이 떡하니 드러났기 때문에 성장한 모습에 대한 감흥이 이미 스포일러 되어 크게 와 닿지 않는 문제도 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히로아카가 아직까진 버티고 있으나 얼마나 버틸수 있을지, 혹은 성장형과 완성형을 섞어 만든 형태에서 발전이 가능한지 알고 싶기도 하다. 다만 히로아카의 가능성에 대한 기대 이건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사견이고, 엄밀히 말해서 이걸 혼용해서 사용하는 것은 절대 금해야 할 것이다. 최소한 쓰려면 완성형의 형태를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추상적으로 표현하여 독자의 궁금증을 불러 일으켜야 한다.
원래는 위쳐의 게롤트에 대해서 고찰하던 중 다른 완성형 캐릭터 중에서 오버로드의 모몬가라고 하는 완성형 캐릭터가 완성형 캐릭터로서의 매력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 그것을 판단하기 위해 분석하려던 것이었는데 생각 해 보면 오버로드가 흥하는 관점을 봤을 때 그건 완성형 캐릭터이기 때문인건 아닌 것 같다. 오버로드에서는 완성형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매력이 전혀 없다. 예컨데 헬싱의 아카드의 경우에도 악의 위치에 선 캐릭터지만 행동은 제약 받은 선의 입장이고, 오히려 대립하는 것은 신부들인 선의 위치의 종교측과 싸우기도 하고, 나치를 바탕으로 하는 악의 세력과도 싸우는데, 오버로드의 경우에는 그런 선에 관한 카타르시스가 없다. 작가는 뭐 이세계물의 무분별한 행동의 안티테제라고 말하긴 하는데 주인공에게 1인 2역을 하면서까지 그런 짓을 시키는 것 치고는 그다지 안티테제라는 느낌은 들지 않고 오히려 캐릭터 자딸에 가까운 느낌만 들고, 이세계 넘어와서 깽판치는 것을 통렬히 비판하고 싶었다 쳐도 모몬가라고 하는 캐릭터가 하는 짓은 대체 어떤 점을 비판하고 싶었는가를 알기가 어렵다. 또한 단순하게 생각해서 그에게 적대 할 만한 실력의 존재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과 더불어 설령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길드째로 전이된 상황에서 전력의 차가 현저하게 나기 때문에 대체 어떤 점에서 긴장감을 부여 하려고 하는 것인지를 알 수 없다.
결국 남는 것은 캐릭터가 펼치는 무쌍이나 감상하고 그 결과물 가지고 서로 우왕좌왕 하는 마치 원펀맨과 같은 상황인데 그렇다면 오버로드는 엄밀히 말해 완성형 캐릭터물로서는 최악의 형태이지만 성공한 형태일듯 싶다. 원펀맨은 최소한 그가 가진 힘을 적당히 쓰고, 건성이더라도 선을 행하지만 오버로드는 그게 아니니까. 그런데 엄밀히 말해 나는 원펀맨이 흥한 이유도 사실 이해가 안 가지만 오버로드가 흥한 이유는 더더욱 이해가 가질 않는 상황이다. 최소한 원펀맨의 사이타마는 강함에 대한 염세적인 반응과 동시에 강한 자를 찾는 욕구가 은연중에 나타나기에 작가가 생각한 강함에 대한 이미지를 생각 해 보려는 메세지는 전달 되는 반면 오버로드의 경우에는 작가가 말한 이세계 깽판물에 대한 안티테제로서의 메시지는 전혀 전달이 안 되기 때문이다. 이세계 깽판물이 가지는 모순을 드러내기 위한게 아니라 오버로드는 이세계 깽판물 그 자체가 되어 있는 상황이고, 일부러 싸움을 유도하여 수십 수만을 쳐 죽이는 상황에서 접수한 왕국의 국민들에게 따스한 꼴을 해 봐야 학살자라는 점에서는 변함 없는데 온갖 찬양이 돌아오는 상황에서 이걸 과연 안티테제는 고사하고 자캐딸 소설 그 이상이 될 수 있을지가 의문인 것이다.
앞서 말한 위쳐의 경우에는 위쳐라고 하는 직업 자체가 사람들에게 환대받지 못 하지만 사람들이 살기 위해선 위쳐에게 의뢰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고, 위쳐 또한 배운게 괴물 죽이는 짓이지만 리스크가 너무 크고, 괴물을 잡기 위해 준비하거나 먹고 살기 위해선 돈을 받아야 하는데 위쳐를 고깝게 보는 일반인들은 위쳐에게 어떻게든 돈을 안 내려고 바둥바둥 하는 상황에서 플레이어는 단순히 세상을 선과 악으로 나누어 한쪽만 바라보는게 아니라 그 둘을 바라보는 중립적인 느낌으로 진행되는데, 오버로드의 경우에는 이세계를 공격하는 측과 공격 당하는 측 그 둘을 동시에 보여주긴 하나, 엄밀히 말해 이걸 깊이감 있게 보여주거나 독자에게 생각 할 거리를 던져주는 형태는 아니다. 가만히 잘 살고 있었는데 멋대로 넘어온 놈들이 시비 털어서 유린하는 것을 바라보며 오오 최강 최고 이러는데 언뜻 보기에는 양측을 조명하는 것 같지만 엄밀히는 약탈하는 쪽을 일방적으로 치켜세우기에 무조건적인 한쪽 편들기 즉 자딸에 가깝다.
엄밀히 말해 안티테제가 되기 위해서는 테제인 기존 작품의 모순을 드러내야 하는데, 오버로드에서 보여주는 기존 작품의 모순이 없다. 오히려 테제 그 자체를 그대로 따라가는 형태에 가깝다. 그나마 팬덤이 클리셰 비틀기라 말하는 현대인 천재설을 비트는 입만 현자 같은 요소는 실제로 그걸 모순으로서 보여주는 형태도 아니고 클리셰 비틀기도 아니다. 그저 작가가 현대인이 이세계 가 봐야 할 수 있는게 없다 수준으로 부정하고 까내린 것 뿐이다. 애초에 마법이 존재하는데 현대인 천재론을 들이밀어 봐야 마법으로 때우면 그만인 상황에서 의미가 없다. 듣기로는 실제로도 입만현자가 말한 물건을 마법으로 구현했다 하니 오히려 이건 모순을 까려고 클리셰 비틀기를 한게 아니라 오버로드 작품 자체가 스스로 모순이 된 격이다. 현대인 천재론을 까기 위해서는 현대인의 지식이 그 시대에서 이미 더 효율적인 방식으로 가능하거나 아니면 아예 쓸모 없음을 입증해야 하는데, 그의 지식을 받아들여 사용하는 자가 나타나 버리게 되면 현대인 천재론은 유용한 것이 되어버린다. 예컨데 현대인이 이세계에 넘어가서 컴퓨터라는게 있습니다. 알맞은 소프트웨어가 있으면 계산도 손쉽게 하고 인터넷에 접속되면 아무리 먼 곳에 있는 사람하고도 연락을 할 수 있죠. 다만 모니터도 있어야 하고 전기도 통해야 하고 등등 이러다가 이세계인들에게 응? 우린 마법으로 멀리서도 연락을 주고 받는데? 전기? 마법으로 불러내면 되는데? 그냥 안 되고 발전기를 돌려야 해? 그럼 골렘 만들어서 돌리게 하지 뭐. 계산? 그냥 계산하면 되지 않나? 복잡한 수식을 계산하려면 필요하다고? 그럼 숫자판에 마법을 걸어서 수식 규칙대로 알아서 움직이게 해야 겠네 식으로 필요 없거나 그 이상의 방법이 있음을 증명하면 되는 것이다.
클리셰를 비틀어도 그걸 통쾌하게 비틀어야 인상이 남는 법이고 그러한 예시를 쓴 것이 최근에는 코노스바나 이세계가 게임이란건 나만이 알고 있다 라던지가 있고,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슬레이어즈의 리나 인버스처럼 완성형 주인공에 착하지도 않은, 그런 주제에 먹보 빈유 성깔 나쁨 등 그것이 오해에 오해를 불러 일으키고 마치 트라이건의 바슈처럼 인간재앙으로 불리며 그 시대 여주인공의 특징을 확 비틀어 버린 캐릭터였지만 엄청난 인기를 끌었었다.
그런데 오버로드는 그저 주인공측이 성질 나쁜 깽판깡패일 뿐이다. 클리셰 비틀기도 없고 일반적으로 느끼는 통쾌함도 없고, 결국 결론은 오버로드에서 보여지는 깽판이 소비자 층에게 먹혔다 정도 뿐이다. 솔직히 그런 오버로드에서 완성형 캐릭터의 완성도나 중요도를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다고 느끼게 된다. 참 아쉬운 일이긴 한데 이런 기형적인 상황도 가능하구나 하는 교훈 정도는 느꼈다.
생각 해 보면 소아온의 키리토도 초반엔 성장하는 척 했지만 결국 사냥터 독점으로 레벨업한 완성형 캐릭터로 끌고 나왔는데 이 역시도 딱히 완성형 캐릭터가 가지는 매력을 제대로 끌어내지는 못 했다. 메리수가 되어 버린 키리토 올인 체제에, 특히 초반의 사치 에피소드는 게임의 잔인함과 키리토의 암울한 과거를 새기고 솔로 플레이에 올인하게 하려던 목적이었겠지만 그냥 쿨병 종자가 쿨병짓 하다가 사람 죽게 만들었는데 혼자 알아서 극복 식이 되어버려 공감대도 얻지 못 했고, 혼자 존나 쩔게 강해서 멋진 척은 다 하는 그런 캐릭터였다. 신기하게도 양판소의 구성과 그다지 다를바 없었고 수천명의 목숨을 가지고 인질극한 정신나간 악역 미화 등 제대로 된 작품이라고는 보기 어렵지만 여전히 애니메이션은 계속 나오고 책도 계속 나오고 있다.
일본의 서브 컨텐츠 질적 하락은 잘 알려진 사실이긴 하지만 이렇게 보니 정말 심각하구나 하는 느낌이 든다. 물론 실력 좋고 작품성 좋은 것들도 흥행이 되긴 하지만 쿨병 걸린 학살종자 메리수 캐릭터가 각광을 받는다는 점에서 그만큼 자존감이 썩어서 대리만족이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것을 빠르게 실현 시켜 줄 수 있는 것이 완성형 캐릭터가 된 것이다.
하기사 최근에 방영하는 전생 슬라임도 결국엔 걍 메리수 캐릭터 자딸용이었고, 고블린 슬레이어도 레벨업 다 시켜 놓고 전장에 내보내는 완성형 캐릭터식이었다. 그나마 넷상에서 괜찮은 작품이다 라고 말하는 변경의 팔라딘도 정작 성장을 다 시켜 놓고 내보내는 식이었고. 근데 걔는 애니메이션화 되지 않은 것을 보니 성장에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면 인기가 없나보다.
확실히 완성형 캐릭터는 이미 완성되어 있기에 그냥 그대로 스토리를 풀어나가면 되는 반면 성장형 캐릭터는 찌질한 주인공이 완전체가 될 때 까지의 과정을 그려내야 해서 어지간한 인기를 끌지 못 하면 주목을 받지 못 하곤 한다. 예컨데 오리지널 에피소드까지 집어넣는 원피스나 나루토의 경우에는 엄청난 인기를 끌었기에 가능했지만 실제로 그런 성장형 주인공 애니메이션은 2쿨 이상을 넘기기가 어려운 것도 현실. 그렇다고 그렇게 1~2쿨로 끝내서 결말은 커녕 중간도 못 보여주면 애니화 한 의미도 없다. 즉 일본의 서브컬쳐 애니업계에 비상식적인 거품과 착취가 결국 좋은 작품을 롱런하기에 적합하지 않아 1~2쿨로 끝내도 전개에 차질이 없는 완성형 메리수 타입에 주목하게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완성형 캐릭터가 나쁘다는 것도 아니고 예컨데 혈계전선도 기본적으로는 완성형 캐릭터들이 무더기로 나와서 노닥거리는거지만 적절한 캐릭터성과 완성형 캐릭터가 가지고 있어야 할 점들을 갖춰 나름 인기를 끌었다. 문제는 질적 하락이 눈에 띄는 것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는 상황은 어째서 그딴게 상품이 되는거지? 라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수가 없는 것.
과연 지금처럼 일본 서브컬쳐가 완성형 자딸 메리수캐에 집착하면 혹시나 하는 생각이지만 한국 컨텐츠에 질적으로 밀려 순위가 바뀌는 상황이 올까 하는 기대도 들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워낙 쌓아놓은게 있는 일본이다 보니 그리 쉽게는 바뀌지 못 하겠지. 거기다가 한국 컨텐츠 시장의 문제점도 만만치 않으니....
2018년 10월 30일 화요일
유치원 대란에 대한 개인적인 다른 생각
유치원 대란은 유치원의 비리니 원래는 개인 학원과도 같았던 사립에게 유치원의 자격을 주고 보조금 타먹기로 끌어들인걸 이제는 나몰라라 하는 정부의 무책임이니 하는 문제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유치원 문제는 부모가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서 비롯한다고 여겨진다. 실제로도 유치원의 비리보다 그 유치원이 문 닫아서 애를 못 보낼까봐 끙끙대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까.
전세계적으로 출산율은 급감하는 편이지만 대한민국 출산율은 이제 1도 채 되지 않을수 있는 상황까지 왔다. 여러가지 요인이 있겠지. 과거와는 다르게 전체적으로 올라간 의식 수준이 같은 수준을 요구해서 상대를 까다롭게 고르고, 아이를 위한 환경을 위해 더 나은 생활 수준을 위해 돈을 보고, 그렇게 고르고 고르다 보니 결혼하기 싫어지고 애 낳기 싫어지고, 애는 낳았는데 돌보기 싫어지고. 그럴 수도 있고, 정말 돈 때문에 애 가지기 싫을 수도 있고, 과거와는 다르게 범죄도 줄었지만 동시에 인간이 잔인해지고 책임감이 없어져서 영아 유기를 많이 한다던가 할 수도 있고, 베이비 프리미엄을 장사수단으로 써 먹는 사기꾼 장사치들이 만든 상황이 고착 시켰을 수도 있고, 어쩌면 이게 인류 멸망을 위한 단계이고 인간은 벗어날 수 없는 과정일수도 있고, 헛소리를 한다면 늘어놓을 것이 한도 끝도 없다.
하지만 인식의 변환. 그것에 대해서만큼은 말하고 싶다. 인식이 변했다. 이게 정말 뼈저리게 느껴진다.
나 중고딩 시절만 해도 남자는 가정을 꾸리고 결혼 해서 아이를 가지는게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한 15년~20년 전쯤이었을 거다. 그러면 너무 노땅같으니 딱 15년 정도 라고 치자.
실제로 그런 분위기가 있었기에, 고딩 시절에 와 결혼하고 가정 가질수나 있을까? 하는 그런 의문을 가진 적도 있었지만 웃기게도 이게 5년인가 그 안에 확 바뀌어 버렸다.
뭔 크래커 마냥 바삭바삭 부서져서는 결혼하고 가정 꾸린다는 보편적인 인식이 박살나고 싱글을 찬양하기 시작했다. 핵가족 세대를 경고하던 교과서 내용과는 달리 성년이 되서 보니까 걍 지혼자 잘 살더라 이거다. 그래도 10년전까지만 해도 뭐 결혼은 해야 하지 않겠어? 라는게 그나마 남아 있던 인식이었는데 이게 또 그 뒤 3~5년만에 팍팍 깨지기 시작한다. 결혼비용 때문이다. 억대를 부르는 결혼 비용이 사회적 문제로 화자되면서 결혼에 대한 부담이 팍팍 늘어났다. 그러다 보니 또 결혼 해야 하나? 라는 인식이 퍼지고 내리면서 결혼 하지 말지 뭐 그렇게 되어 버렸다. 일본의 초식남 어쩌구 하면서 혼자 사는게 좋다더라 하고 그런 분위기도 팍팍 퍼져나갔고 말이다.
웃기게도 이 과정 속에서 진짜 그 시대를 살던 애들은 뭐 별 생각이 없었다. 대체 왜 저런 일들이 벌어지는거지? 하는 의문만 있었는데 막상 접하면 그냥 사회가 확확 변하더라 이거였다. 난 별 생각 없었는데 갑자기 세상이 싱글을 이야기 하고 결혼 비용을 이야기 하고 그렇더라 저렇더라 그러다 보니 어라? 난 그 가운데에 놓여 있었더라.
결혼 하기 싫은 것도 아니고 사랑 하기 싫은 것도 아니지만 핑계 대기 싫은 것도 아니다. 내가 실패 한 것도 아니지만 실패하지 않았음을 어필하기에는 딱 좋은 환경이 갖추어져 있는 상황. 이 상황에서 나도 싱글 해 버리지 않으면 왠지 손해 볼 것 같은 느낌? 그런 형태로 흘러가는 것 처럼 느껴진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시간은 덧없음을 느끼는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무기력하게 흘려 보낸 시간들을 떠 올리면 그 안에서 과연 연애하고 결혼 할 시간이 있었을까 싶기까지 한데, 과연 진짜 연애하고 결혼 할 만큼 여유롭던가 자유롭던가 하는 의문도 든다.
돈 때문인가? 돈 때문일수도 있겠지. 하지만 꼭 그것 때문은 아닐것 같다. 사랑도 돈 결혼도 돈 육아도 돈으로 치부하는 세상이지만 꼭 그것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핑계대기에는 더할나위 없이 좋다. 돈 없어서 못 했어요. 너무나도 좋은 핑계다.
실제로 이 사회를 주도하는 가진자. 주도권층은 청년층이 아닌 4~50대 이상의 장년층들. 그들이 가진 재산과 사회적 위치가 내려가질 않아 청년층은 올라갈 수 없는 상황에서 웃기게도 인식 만큼은 청년 위주로 돌아간다. 돈은 절대 그들 위주로 돌아가지 않지만.
인식이 빨리 빨리 변하고 그에 수긍하는 분위기로 전환되지만 정작 가진자는 청년이 아닌 상황에서 뭐지? 싶은 아이러니함만 남는다. 정말 뭐지? 싶다. 왜 이들은 가진자가 아닐까? 노력이 부족해서? 운이 없어서? 사회적 상황이 여의치 못 해서? 모르겠다. 성공하는 청년을 쫓으면 부모 돈 몇천만원에 부모 건물 받아서 흙수저로 시작했어요로 시작하는 글귀에 분노하는 사람들. 하지만 세상의 논리는 잔인하다. 자본금 없이 사업 못 하는게 현실이고, 사업도 못 하면 돈을 크게 벌 수 없고 성공하기 힘들다. 단순히 가진 재능만 가지고 뛰어들기에는 세상은 벽이 너무 많고 높고 크다. 그러니 안전빵으로 공무원 노리는게 또 대세가 되고, 재능 가지고 성공 이라하면 노래 부르거나 힙합 하거나 이런 걸로 꼬드기곤 한다. 사실 노래 불러서 아이돌로 뜨는게 요즘 시대의 성공으로 자리 잡은 것도 현실이라면 현실.
아 그래서 다들 결혼하기 싫어서 좋은 핑계거리 갖는데 유치원은 대체 왜 난리인데? 오히려 출산율이 줄었으면 유치원 줄여도 되는거 아냐? 라는 생각이 드는데 정말 유치원은 왜 난리?
그래서 또 생각 해 보면 웃기는게 앞서 말한 인식의 변화만큼 빠른 것이 바로 애 돌보기 인식의 변화다. 요즘은 부모가 애를 안 돌본다. 어린이집이다 학원이다 뭐다 해서 전부 다른 사람들이 돌본다. 부모는 어디? 20년전만 해도 부모가 애를 안 돌보면 부모가 대체 뭐하는거야? 라는 말이 나왔다. 근데 요즘은 안 그런다. 쌈 붙는게 무섭고 시비 털리는게 싫으니까 잠잠하다. 싸가지 없는 애새끼 부모 새끼 서로 안 패는 기조에 한껏 불 붙이는게 나랑 상관 없으면 쉬쉬. 인식의 변화였다.
나 옛날 어릴적 이거 또 써 먹는데 진짜 요즘은 정말 옛날 같지 않다. 옛날에 애가 잘못 하면 부모가 와서 싹싹 빌고 미안하다고 했는데, 요즘엔 애가 잘못 하면 변호사나 경찰이 뜨는 듯 하다. 가해자는 우리 애는 잘못 한거 없다면서 적반하장으로 나오고 피해자를 협박까지 한다. 옛날 같았음 마을 단위로 린치를 가해서 가해자 새끼가 저딴 짓거리를 하면 저딴 새끼 우리 마을에서 내쫓아! 살지 못 하게 해! 라고 했을 텐데, 이제는 마을이 아파트라 층마다 분위기가 달라 굳이 터치를 안 한다. 너무 심하게 린치를 가하는 것도 좋은건 아니지만 이제는 아예 건드릴 생각을 안 하니까 그렇게 쳐 맞아 본 적이 없는 새끼들이 심각하게 나대는 경향이 있다.
노키즈존. 이것도 최근에 생긴 인식이다. 옛날엔 안 그랬다. 식당에서 애새끼들 뛰어다니는건 당연했는데 너무 심하면 어른이 어험 욘석들아 그러면 못 써 하고 그러면 애들이 네~ 하고 조용해진다. 정 뭐하면 부모가 직접 타이르거나 걍 내보냈다. 근데 요즘에 그런 짓 했다가는 쳐 맞아 본 적 없는 부모 새끼들이 어머 당신이 뭔데 내 아이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는거야? 라고 지껄인다. 식당 분위기를 위해 단골이 한마디 했는데 순식간에 천하의 썅놈 새끼가 되어 버리고 뻘쭘해져서는 그 식당 안 가게 되고 단골 사라지고 애새끼들은 무쌍난무를 펼치는데 막을 자가 하나 없고 그 부모 새끼들은 대가리가 없으니 당연히 노키즈존을 선호하게 된다.
내가 대체 왜 이렇게 말을 길게 끄는지 궁금 할 것이다. 그래. 이거다. 인식의 변화. 과연 지금의 애를 키우는 부모들은 애를 키울 만큼의 인식이 있긴 하냐? 라는 의문이 든다.
지금 유치원에 애들 보내는 부모들은 그거잖아. 유치원에 안 보내면 어떻게 하냐 이건데
원래 애는 부모가 키웠어요. 지금의 부모들도 그 부모가 키웠구요. 정말 언제부터 애들 유치원에 보내놓고 나몰라라 하는 풍조가 퍼졌는지 이해가 안 가지만 유치원은 의무 교육이 아닙니다. 근데 뭔 의무교육 마냥 생각해서 유치원 보내 놓고 더 오래 두면 안 되요? 이런 생각 품는 부모가 한둘이 아니라 이거지. 애 키우기 싫은 부모가 유치원에 떠넘기는게 지금 부모들의 인식에 널리 퍼졌다 이거다.
또 그럼 핑계 나오겠지. 아니 그럼 애 키우는데 돈은 어떻게 해요. 돈 벌어야 애를 키우지. 하면서 애 유치원에 보내고 자기는 돈 벌러 간다고. 근데 진짜 돈 때문이면 애를 안 낳았겠지. 유치원 보내는 3세~6세까지 그 6년의 기간. 근데 돈 없어서 연애 못 하고 결혼 못 하고 애 못 낳고 하는 인식의 변환 기간. 어라? 다르지 않네? 이거 뭐야? 어디 다른 평행우주에서오셨나? 돈 때문에 못 한다는 인식이 팽배한 상황에서 애는 태어나고, 다시 돈 돈 돈 근데 진짜 돈이야? 돈 때문이 맞긴 해? 그냥 책임전가가 아니고?
작금의 상황이 핑계 대기 좋은 상황인건 인정해. 청년들 돈 없고 힘들고, 뭐 미래 없고 비전 없고 근데 돈이 없는 걸 핑계로 댄다 쳐도 책임감이 없는 걸 핑계 대는건 아니잖아? 과연 부모로서 애들을 유치원에 보내지 않고도 키울 수 있는 책임감 있는 부모라면 애를 유치원에 못 보내는게 문제일까? 아니면 유치원의 문제를 그냥 두고 보는데도 애를 보내야 하는게 문제일까? 설령 유치원을 못 보낸다 하면 과연 그 책임감 없는 부모들은 유치원만 안 보낼까?
아무리 세상의 인식이 바뀌고 대안이 늘어나도 기본적으로 애는 부모가 돌보는거다. 그런데 문제는 인식의 변화가 퍼지는 것과 동시에 애를 키우기 싫은데 억지로 키우는 부모도 점점 늘어난다는 것이다. 어른이 되지 못 한 사람들이 부모가 되서 벌어지는 일이다.
애는 부모가 키운다는 관점에서 봤을 때 유치원 대란은 유치원 비리라는 점 말고는 큰 해프닝이 될 꺼리가 없다. 그런데도 지금 상황은 정부, 유치원, 부모 전부 전전긍긍하고 있는게 코미디다. 부모는 애를 떠넘기고 싶어하고, 정부는 유치원에게 떠넘겼고, 그 중 사립 유치원은 비리 논란에 휩싸였는데 사립을 빼자니 애를 둘 곳이 없고. 정작 이 와중에 가장 큰 책임감을 필요로 하는 것이 유치원이라는 사실이 코미디인것이다. 만약 사립 유치원이 책임감 없이 그냥 폐원 해 버리면 오갈데 없는 아이들이라는 웃기지도 않는 문장을 써 가며 방황하는 부모들을 피해자로 둔갑 시킬테니까.
부모로서 책임감은 그 어떤 것보다도 가장 중요한 점이다. 최근의 현실에서 애 패면서 교육 시킨다 하면 어머 저 사람 폭력 부모야 하겠지만 옛날엔 잘못하면 전부 줘패서 키웠다. 하지 말란거 또 하면 진짜 말 안 들어 먹는걸 매로 못 하게 했고
그런데 요즘은 진짜 애 패는 걸 본 적이 없다. 마트에서 애가 징징대도 들어주기만 하지 안 돼 라고 하는 걸 볼 수가 없다. 장보러 마트에 가면 꼭 애 데리고 오는 부모가 애를 다루질 못 해서 마트 전체에 애 우는 소리가 울릴 정도다. 그런데 정작 그 부모는 그냥 모르쇠 한다. 한둘이 그러는 것도 아니다. 거의 모든 부모들이 그런다. 부모들의 애를 다루는 스킬이 사회적 인식의 변화와 함께 퇴화했다. 보는 입장에선 그냥 좀 패서 가르쳐라 라고 하고 싶을 정도다.
사회적 인식이 부모에게서 매를 빼앗은 이상 부모가 애를 다루는 방법이 제한되고 그렇게 자기 주장만 열심인 애를 바라보는 부모 입장에선 속만 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괜히 책임감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 공연히 애가 싫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괜히 매라도 들었다가 돌아올 반응은 싸늘 할 터이고 말이다. 그러니까 떠 맡기고 싶어지는 것이다. 제발 얘 좀 맡아주세요 라고. 그런데 웃긴건 사회적 인식이 계속 변화하는데 정작 변화가 더딘게 하나 있다. 애들은 원래 그래. 이거다.
애들은 원래 그래. 이 웃긴 인식은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사라질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애들이 원래 그렇긴 뭐가 원래 그래? 애는 부모하기 나름이다 주변환경 나름이다. 결코 애라서 무턱대고 애같은 짓거리를 하는게 아니다. 아빠 엄마 없이 할머니나 할아버지 모시고 사는 애가 동생도 딸려 있을 경우 가정을 부양하기 위해 과도하게 성숙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 그게 원래 애라서 그런가? 아니다. 환경이 그렇게 애를 변화시킨다. 용인 벽돌 사건은 애라서 사람 죽였나? 애라서 원래 그런가?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애들은 원래 그래 라는 소리가 나올 수 있는가? 애들은 원래 그래. 그런데 원래 그랬던 그때 그 시절 체벌은 정작 쏙 빼놓지 않았던가? 원래 그랬던 애들에게서 원래 그래왔던 체벌을 쏙 빼 놓으니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되는 것은 필연이며 그 고삐풀린 망아지를 통제하지 못 해 떠넘기지 못 해 안달이 되는 것도 필연이다.
인식의 변화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는 변화를 통해서 자기검증을 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급격하게 변화하는 인식과 결코 변화하려하지 않는 인식이 서로 충돌을 할 경우 기울어진 운동장 마냥 한쪽이 모든 것을 뒤집어 쓰게 되는 경우가 있다. 유치원 대란은 이러한 인식의 변화의 과정에서 생겨난 일 중 하나일 뿐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는 이보다 더 다양한 문제들이 산적해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어디서부터 고쳐나가야 할 지 난감 할 정도로 꼬여있는 이 판국에 그 애들은 원래 그래 라는 인식은 아이러니하게도 바뀌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것도 그럴 것이 교육을 제대로 못 시켜서 망아지가 되어 버린 자식들을 합리화 시키기에는 애들은 원래 그래 라는 말 이상으로 매혹적이고 그럴싸한 말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의 상황은 책임감 없는 애들이 애를 키우는 꼴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유치원 문제는 부모가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서 비롯한다고 여겨진다. 실제로도 유치원의 비리보다 그 유치원이 문 닫아서 애를 못 보낼까봐 끙끙대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까.
전세계적으로 출산율은 급감하는 편이지만 대한민국 출산율은 이제 1도 채 되지 않을수 있는 상황까지 왔다. 여러가지 요인이 있겠지. 과거와는 다르게 전체적으로 올라간 의식 수준이 같은 수준을 요구해서 상대를 까다롭게 고르고, 아이를 위한 환경을 위해 더 나은 생활 수준을 위해 돈을 보고, 그렇게 고르고 고르다 보니 결혼하기 싫어지고 애 낳기 싫어지고, 애는 낳았는데 돌보기 싫어지고. 그럴 수도 있고, 정말 돈 때문에 애 가지기 싫을 수도 있고, 과거와는 다르게 범죄도 줄었지만 동시에 인간이 잔인해지고 책임감이 없어져서 영아 유기를 많이 한다던가 할 수도 있고, 베이비 프리미엄을 장사수단으로 써 먹는 사기꾼 장사치들이 만든 상황이 고착 시켰을 수도 있고, 어쩌면 이게 인류 멸망을 위한 단계이고 인간은 벗어날 수 없는 과정일수도 있고, 헛소리를 한다면 늘어놓을 것이 한도 끝도 없다.
하지만 인식의 변환. 그것에 대해서만큼은 말하고 싶다. 인식이 변했다. 이게 정말 뼈저리게 느껴진다.
나 중고딩 시절만 해도 남자는 가정을 꾸리고 결혼 해서 아이를 가지는게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한 15년~20년 전쯤이었을 거다. 그러면 너무 노땅같으니 딱 15년 정도 라고 치자.
실제로 그런 분위기가 있었기에, 고딩 시절에 와 결혼하고 가정 가질수나 있을까? 하는 그런 의문을 가진 적도 있었지만 웃기게도 이게 5년인가 그 안에 확 바뀌어 버렸다.
뭔 크래커 마냥 바삭바삭 부서져서는 결혼하고 가정 꾸린다는 보편적인 인식이 박살나고 싱글을 찬양하기 시작했다. 핵가족 세대를 경고하던 교과서 내용과는 달리 성년이 되서 보니까 걍 지혼자 잘 살더라 이거다. 그래도 10년전까지만 해도 뭐 결혼은 해야 하지 않겠어? 라는게 그나마 남아 있던 인식이었는데 이게 또 그 뒤 3~5년만에 팍팍 깨지기 시작한다. 결혼비용 때문이다. 억대를 부르는 결혼 비용이 사회적 문제로 화자되면서 결혼에 대한 부담이 팍팍 늘어났다. 그러다 보니 또 결혼 해야 하나? 라는 인식이 퍼지고 내리면서 결혼 하지 말지 뭐 그렇게 되어 버렸다. 일본의 초식남 어쩌구 하면서 혼자 사는게 좋다더라 하고 그런 분위기도 팍팍 퍼져나갔고 말이다.
웃기게도 이 과정 속에서 진짜 그 시대를 살던 애들은 뭐 별 생각이 없었다. 대체 왜 저런 일들이 벌어지는거지? 하는 의문만 있었는데 막상 접하면 그냥 사회가 확확 변하더라 이거였다. 난 별 생각 없었는데 갑자기 세상이 싱글을 이야기 하고 결혼 비용을 이야기 하고 그렇더라 저렇더라 그러다 보니 어라? 난 그 가운데에 놓여 있었더라.
결혼 하기 싫은 것도 아니고 사랑 하기 싫은 것도 아니지만 핑계 대기 싫은 것도 아니다. 내가 실패 한 것도 아니지만 실패하지 않았음을 어필하기에는 딱 좋은 환경이 갖추어져 있는 상황. 이 상황에서 나도 싱글 해 버리지 않으면 왠지 손해 볼 것 같은 느낌? 그런 형태로 흘러가는 것 처럼 느껴진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시간은 덧없음을 느끼는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무기력하게 흘려 보낸 시간들을 떠 올리면 그 안에서 과연 연애하고 결혼 할 시간이 있었을까 싶기까지 한데, 과연 진짜 연애하고 결혼 할 만큼 여유롭던가 자유롭던가 하는 의문도 든다.
돈 때문인가? 돈 때문일수도 있겠지. 하지만 꼭 그것 때문은 아닐것 같다. 사랑도 돈 결혼도 돈 육아도 돈으로 치부하는 세상이지만 꼭 그것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핑계대기에는 더할나위 없이 좋다. 돈 없어서 못 했어요. 너무나도 좋은 핑계다.
실제로 이 사회를 주도하는 가진자. 주도권층은 청년층이 아닌 4~50대 이상의 장년층들. 그들이 가진 재산과 사회적 위치가 내려가질 않아 청년층은 올라갈 수 없는 상황에서 웃기게도 인식 만큼은 청년 위주로 돌아간다. 돈은 절대 그들 위주로 돌아가지 않지만.
인식이 빨리 빨리 변하고 그에 수긍하는 분위기로 전환되지만 정작 가진자는 청년이 아닌 상황에서 뭐지? 싶은 아이러니함만 남는다. 정말 뭐지? 싶다. 왜 이들은 가진자가 아닐까? 노력이 부족해서? 운이 없어서? 사회적 상황이 여의치 못 해서? 모르겠다. 성공하는 청년을 쫓으면 부모 돈 몇천만원에 부모 건물 받아서 흙수저로 시작했어요로 시작하는 글귀에 분노하는 사람들. 하지만 세상의 논리는 잔인하다. 자본금 없이 사업 못 하는게 현실이고, 사업도 못 하면 돈을 크게 벌 수 없고 성공하기 힘들다. 단순히 가진 재능만 가지고 뛰어들기에는 세상은 벽이 너무 많고 높고 크다. 그러니 안전빵으로 공무원 노리는게 또 대세가 되고, 재능 가지고 성공 이라하면 노래 부르거나 힙합 하거나 이런 걸로 꼬드기곤 한다. 사실 노래 불러서 아이돌로 뜨는게 요즘 시대의 성공으로 자리 잡은 것도 현실이라면 현실.
아 그래서 다들 결혼하기 싫어서 좋은 핑계거리 갖는데 유치원은 대체 왜 난리인데? 오히려 출산율이 줄었으면 유치원 줄여도 되는거 아냐? 라는 생각이 드는데 정말 유치원은 왜 난리?
그래서 또 생각 해 보면 웃기는게 앞서 말한 인식의 변화만큼 빠른 것이 바로 애 돌보기 인식의 변화다. 요즘은 부모가 애를 안 돌본다. 어린이집이다 학원이다 뭐다 해서 전부 다른 사람들이 돌본다. 부모는 어디? 20년전만 해도 부모가 애를 안 돌보면 부모가 대체 뭐하는거야? 라는 말이 나왔다. 근데 요즘은 안 그런다. 쌈 붙는게 무섭고 시비 털리는게 싫으니까 잠잠하다. 싸가지 없는 애새끼 부모 새끼 서로 안 패는 기조에 한껏 불 붙이는게 나랑 상관 없으면 쉬쉬. 인식의 변화였다.
나 옛날 어릴적 이거 또 써 먹는데 진짜 요즘은 정말 옛날 같지 않다. 옛날에 애가 잘못 하면 부모가 와서 싹싹 빌고 미안하다고 했는데, 요즘엔 애가 잘못 하면 변호사나 경찰이 뜨는 듯 하다. 가해자는 우리 애는 잘못 한거 없다면서 적반하장으로 나오고 피해자를 협박까지 한다. 옛날 같았음 마을 단위로 린치를 가해서 가해자 새끼가 저딴 짓거리를 하면 저딴 새끼 우리 마을에서 내쫓아! 살지 못 하게 해! 라고 했을 텐데, 이제는 마을이 아파트라 층마다 분위기가 달라 굳이 터치를 안 한다. 너무 심하게 린치를 가하는 것도 좋은건 아니지만 이제는 아예 건드릴 생각을 안 하니까 그렇게 쳐 맞아 본 적이 없는 새끼들이 심각하게 나대는 경향이 있다.
노키즈존. 이것도 최근에 생긴 인식이다. 옛날엔 안 그랬다. 식당에서 애새끼들 뛰어다니는건 당연했는데 너무 심하면 어른이 어험 욘석들아 그러면 못 써 하고 그러면 애들이 네~ 하고 조용해진다. 정 뭐하면 부모가 직접 타이르거나 걍 내보냈다. 근데 요즘에 그런 짓 했다가는 쳐 맞아 본 적 없는 부모 새끼들이 어머 당신이 뭔데 내 아이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는거야? 라고 지껄인다. 식당 분위기를 위해 단골이 한마디 했는데 순식간에 천하의 썅놈 새끼가 되어 버리고 뻘쭘해져서는 그 식당 안 가게 되고 단골 사라지고 애새끼들은 무쌍난무를 펼치는데 막을 자가 하나 없고 그 부모 새끼들은 대가리가 없으니 당연히 노키즈존을 선호하게 된다.
내가 대체 왜 이렇게 말을 길게 끄는지 궁금 할 것이다. 그래. 이거다. 인식의 변화. 과연 지금의 애를 키우는 부모들은 애를 키울 만큼의 인식이 있긴 하냐? 라는 의문이 든다.
지금 유치원에 애들 보내는 부모들은 그거잖아. 유치원에 안 보내면 어떻게 하냐 이건데
원래 애는 부모가 키웠어요. 지금의 부모들도 그 부모가 키웠구요. 정말 언제부터 애들 유치원에 보내놓고 나몰라라 하는 풍조가 퍼졌는지 이해가 안 가지만 유치원은 의무 교육이 아닙니다. 근데 뭔 의무교육 마냥 생각해서 유치원 보내 놓고 더 오래 두면 안 되요? 이런 생각 품는 부모가 한둘이 아니라 이거지. 애 키우기 싫은 부모가 유치원에 떠넘기는게 지금 부모들의 인식에 널리 퍼졌다 이거다.
또 그럼 핑계 나오겠지. 아니 그럼 애 키우는데 돈은 어떻게 해요. 돈 벌어야 애를 키우지. 하면서 애 유치원에 보내고 자기는 돈 벌러 간다고. 근데 진짜 돈 때문이면 애를 안 낳았겠지. 유치원 보내는 3세~6세까지 그 6년의 기간. 근데 돈 없어서 연애 못 하고 결혼 못 하고 애 못 낳고 하는 인식의 변환 기간. 어라? 다르지 않네? 이거 뭐야? 어디 다른 평행우주에서오셨나? 돈 때문에 못 한다는 인식이 팽배한 상황에서 애는 태어나고, 다시 돈 돈 돈 근데 진짜 돈이야? 돈 때문이 맞긴 해? 그냥 책임전가가 아니고?
작금의 상황이 핑계 대기 좋은 상황인건 인정해. 청년들 돈 없고 힘들고, 뭐 미래 없고 비전 없고 근데 돈이 없는 걸 핑계로 댄다 쳐도 책임감이 없는 걸 핑계 대는건 아니잖아? 과연 부모로서 애들을 유치원에 보내지 않고도 키울 수 있는 책임감 있는 부모라면 애를 유치원에 못 보내는게 문제일까? 아니면 유치원의 문제를 그냥 두고 보는데도 애를 보내야 하는게 문제일까? 설령 유치원을 못 보낸다 하면 과연 그 책임감 없는 부모들은 유치원만 안 보낼까?
아무리 세상의 인식이 바뀌고 대안이 늘어나도 기본적으로 애는 부모가 돌보는거다. 그런데 문제는 인식의 변화가 퍼지는 것과 동시에 애를 키우기 싫은데 억지로 키우는 부모도 점점 늘어난다는 것이다. 어른이 되지 못 한 사람들이 부모가 되서 벌어지는 일이다.
애는 부모가 키운다는 관점에서 봤을 때 유치원 대란은 유치원 비리라는 점 말고는 큰 해프닝이 될 꺼리가 없다. 그런데도 지금 상황은 정부, 유치원, 부모 전부 전전긍긍하고 있는게 코미디다. 부모는 애를 떠넘기고 싶어하고, 정부는 유치원에게 떠넘겼고, 그 중 사립 유치원은 비리 논란에 휩싸였는데 사립을 빼자니 애를 둘 곳이 없고. 정작 이 와중에 가장 큰 책임감을 필요로 하는 것이 유치원이라는 사실이 코미디인것이다. 만약 사립 유치원이 책임감 없이 그냥 폐원 해 버리면 오갈데 없는 아이들이라는 웃기지도 않는 문장을 써 가며 방황하는 부모들을 피해자로 둔갑 시킬테니까.
부모로서 책임감은 그 어떤 것보다도 가장 중요한 점이다. 최근의 현실에서 애 패면서 교육 시킨다 하면 어머 저 사람 폭력 부모야 하겠지만 옛날엔 잘못하면 전부 줘패서 키웠다. 하지 말란거 또 하면 진짜 말 안 들어 먹는걸 매로 못 하게 했고
그런데 요즘은 진짜 애 패는 걸 본 적이 없다. 마트에서 애가 징징대도 들어주기만 하지 안 돼 라고 하는 걸 볼 수가 없다. 장보러 마트에 가면 꼭 애 데리고 오는 부모가 애를 다루질 못 해서 마트 전체에 애 우는 소리가 울릴 정도다. 그런데 정작 그 부모는 그냥 모르쇠 한다. 한둘이 그러는 것도 아니다. 거의 모든 부모들이 그런다. 부모들의 애를 다루는 스킬이 사회적 인식의 변화와 함께 퇴화했다. 보는 입장에선 그냥 좀 패서 가르쳐라 라고 하고 싶을 정도다.
사회적 인식이 부모에게서 매를 빼앗은 이상 부모가 애를 다루는 방법이 제한되고 그렇게 자기 주장만 열심인 애를 바라보는 부모 입장에선 속만 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괜히 책임감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 공연히 애가 싫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괜히 매라도 들었다가 돌아올 반응은 싸늘 할 터이고 말이다. 그러니까 떠 맡기고 싶어지는 것이다. 제발 얘 좀 맡아주세요 라고. 그런데 웃긴건 사회적 인식이 계속 변화하는데 정작 변화가 더딘게 하나 있다. 애들은 원래 그래. 이거다.
애들은 원래 그래. 이 웃긴 인식은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사라질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애들이 원래 그렇긴 뭐가 원래 그래? 애는 부모하기 나름이다 주변환경 나름이다. 결코 애라서 무턱대고 애같은 짓거리를 하는게 아니다. 아빠 엄마 없이 할머니나 할아버지 모시고 사는 애가 동생도 딸려 있을 경우 가정을 부양하기 위해 과도하게 성숙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 그게 원래 애라서 그런가? 아니다. 환경이 그렇게 애를 변화시킨다. 용인 벽돌 사건은 애라서 사람 죽였나? 애라서 원래 그런가?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애들은 원래 그래 라는 소리가 나올 수 있는가? 애들은 원래 그래. 그런데 원래 그랬던 그때 그 시절 체벌은 정작 쏙 빼놓지 않았던가? 원래 그랬던 애들에게서 원래 그래왔던 체벌을 쏙 빼 놓으니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되는 것은 필연이며 그 고삐풀린 망아지를 통제하지 못 해 떠넘기지 못 해 안달이 되는 것도 필연이다.
인식의 변화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는 변화를 통해서 자기검증을 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급격하게 변화하는 인식과 결코 변화하려하지 않는 인식이 서로 충돌을 할 경우 기울어진 운동장 마냥 한쪽이 모든 것을 뒤집어 쓰게 되는 경우가 있다. 유치원 대란은 이러한 인식의 변화의 과정에서 생겨난 일 중 하나일 뿐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는 이보다 더 다양한 문제들이 산적해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어디서부터 고쳐나가야 할 지 난감 할 정도로 꼬여있는 이 판국에 그 애들은 원래 그래 라는 인식은 아이러니하게도 바뀌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것도 그럴 것이 교육을 제대로 못 시켜서 망아지가 되어 버린 자식들을 합리화 시키기에는 애들은 원래 그래 라는 말 이상으로 매혹적이고 그럴싸한 말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의 상황은 책임감 없는 애들이 애를 키우는 꼴이다.
2018년 10월 24일 수요일
온라인 꼰대 주의보
나는 꼰대라는 말을 그리 잘 안 쓴다. 꼰대라는 단어가 비꼬는 뉘앙스가 들어가 있으며 이는 확고한 근거가 바탕이 되지 않으면 지나친 남용에 의해 스스로의 잣대가 무너지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전 블로그인 이글루스에서도 대통령 욕은 숱하게 해도 꼰대와 관련된 글은 거의 쓰질 않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글은 이전 블로그에서 꼰대라 불렀던 인간에 관한 이야기다. 그렇다. 한번 꼰대는 영원한 꼰대인가보다.
꼰대에 대한 이미지를 들어보자. 뭐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자기중심적인데다가 타인에게 도와주지도 않을거면서 이래라 저래라 하며 자기 좋을 부분만 내세우며, 자기만의 가치관과 기준을 타인에게 강요한다는 점, 솔선수범도 못 하는 주제에 말의 앞뒤가 안 맞는 자가당착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 등이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사회에서 딱히 만나고 싶지 않은 부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런 꼰대를 인터넷에서는 쉽게 볼 수 있다. 참으로 잔인한 세상이다. 자기 가족이 아닌 이상 꼰대는 동네에서도 일주일에 한번 만날까 말까 하지만 인터넷에서는 쉽게 볼 수 있게 된다.
"저도 14살 때 매우 멍청했어요. 제가 14살 땐 트위터도 페이스북도 없었죠. 그러니까 전 멍청했지만 은밀하게 멍청했었던 겁니다."
과거에는 멍청한 짓거리도 한두번 볼까 말까 한 꼰대도 지금 시대에서는 매우 쉽게 볼 수 있다. 이 시대에서는 은밀하게 멍청한 짓거리나 꼰대 짓거리를 하려고 하지 않으니까.
꼰대의 가장 큰 문제점은 자기가 옳다고 믿는다는 점이다. 자신이 틀릴수도 있다는 점을 절대 인정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건드리면 건드릴 수록 더욱 시끄러워진다. 그나마 동네 꼰대라면 다들 쉬쉬 하며 저 인간 병신이야 라며 냅둬 버리겠지만, 온라인에서는 그렇지 않다. 꼰대를 공격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고, 대응하다 지쳐 쓰러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새로 투입되는 전투요원들도 생기기에 온라인은 계속 뜨거워질수가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점은 꼰대는 그나마 귀엽게 표현해서 꼰대라고 하는 것이지 엄밀히 말하면 사회 부적응자에 가깝다는 점이다.
본래 사람은 원만한 관계를 위해서 적당히 맞춰 주고 넘어가려고 하는 편이다. 마찰이 적을 수록 자신에게 돌아오는 위험이 적고, 그렇게 안전하게 살아가는 편이 생존에도 도움이 되고, 사회를 유지하는데 이점이 되어 원만한 사회는 원만한 안전을 이끌어 내기 마련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꼰대는 그렇지 못 하다. 꼰대는 적당히 맞춰주고 넘어가고 그런게 없다. 다 자기 위주다. 처세술이 개판이라 누굴 맞춰주는 것도 못 하고 오히려 맞춰주길 바란다. 말로는 장유유서니 하며 삼강오륜을 읊지만 말과 행동이 따로 논다. 신뢰도도 바닥이다. 눈치도 없어서 싫어하는 사람에게 싫어하는 걸 디민다. 자기가 나이가 많다는 점을 이용해서나이가 어린 사람에게 무례하게 대하며 어리다고 무식할거라 생각하여 자기가 알고 있는 틀린 정보를 강요하고 고치려고 하면 대놓고 무시한다. 도와 줄 것도 아니면서 오지랖이 심하다. 상대가 기뻐 할 일이 생겨도 찬물 끼얹듯 쿨병 걸린 척 폄하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살고 고치지도 못 하다 보니 주변에서는 배척을 당한다.
완벽한 사회 부적응자의 표본이다.
문제는 그 사회 부적응자가 적당한 위치를 지녔을 때의 문제다. 그렇다. 그 온라인에서 활발하게 타오르는 장작의 주범인 자칭 음식 평론가 이야기다.
난 이전에 그 사람이 혼밥을 사회적 자폐라고 한 것에 대해서 반론하는 글을 쓴 적이 있었는데, 사실 그냥 지나가던 글쓴이가 인터넷에서 덧글을 적은 정도로는 굳이 반론을 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뭐지? 저 병신은? 정도로 치부하거나 그 덧글에 답글로 싸웠겠지.
하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단순한 지나가던 병신이 아닌 적당한 위치를 지닌 병신이었기에 충분히 다수의 공분을 사고 공격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단순히 덧글란에서 치고 박는 난장판이 아닌 그가 떠벌이고 다니는 것을 담는 매체마다 난장판이 되고 만다. 일개 덧글러의 덧글을 뉴스 매체가 다룰 일이 없듯이 그가 가진 사회적 위치를 제대로 추스리지 못 한 자의 결말은 논란만 불러 일으키고 좋은 이미지를 쌓지 못 하여 결국 그 사회적 위치마저 무너지고 마는 것일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그 위치에 올려 놓은 것도 매체이고, 그를 떨어 뜨리는 것도 매체이다. 만약 매체들이 그의 개소리를 흔한 덧글러의 헛소리로 치부해서 다루지 않았다면 아마도 대중들의 관심을 크게 받지는 못 하였겠지만, 매체들이 그의 이야기를 다루어 적당한 위치를 주었던 것 처럼 마찬가지로 그의 헛소리를 매체들이 다룸으로서 다시 끌어내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이 과정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 대중들이 관여 할 수 있는 점이 극히 적다는 점이다.
매체의 영향력이 큰 반면 그 매체들의 자기검열과 자정작용은 그리 대단하지 않다. 적절한 기준에도 못 미치고 자격도 없는 사람들에게 매체는 쉽사리 이미지와 위치를 만들어 준다. 그리고 이슈에 따라 부풀리고 관심을 받으려는 것이 전부다. 그래서 면피용 문구도 이렇지 않은가. 출연자의 의견은 방송의 입장과 다릅니다 라고 말이다. 그 출연자를 데려와서 메세지를 전달시킨 것은 매체임에도 그들은 전혀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는다.
이는 우리가 앞으로도 숱하게 봐야 할 상황임을 암시하고 있다. 어설픈 사람을 매체에 출현 시키고 그의 말을 띄워 주었는데 그가 꼰대임이 밝혀지고 나면 대중들은 그 꼰대와 싸우지만 정작 그 꼰대에게 위치를 부여한 매체는 나몰라라 한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시청률 하락이거나 대중들의 외면으로 돌아오겠지만 그러한 것도 출연자 교체로 메꾸면 무리가 없다.
사회 부적응자인 꼰대의 개소리와 책임감 없는 매체의 일방적인 메세지 전달 사이에서 대중들은 자연스레 피곤 해 질 수 밖에 없다. 오프라인 꼰대처럼 그냥 무시하고 안 보고 안 들으면 그만이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온라인 꼰대에게 불이 붙어 달려드는 사람들이 있는 한 논란이 빠르게 수그러들긴 매우 어렵다. 결국 스스로 매체와 꼰대를 주의하여 거리를 두는 수 밖에 없다.
세상이 발전하여 거리에 상관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의견을 낼 수 있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 거리에 상관없이 다양한 꼰대들이 일방적인 메세지를 강요하게 된 것은 웃긴 일이다.
그나마 스파이더맨에서 JJJ 이 양반의 뚜렷한 캐릭터성은 자신의 신념과 맞지 않으면 설령 이전까지 지지했더라도 바로 철회하고 적으로 돌릴 수 있다는 점인데, 온라인 꼰대들에겐 그런 캐릭터성 조차 없다는 점이 참으로 안타깝다.
어떻게 보면 스파이더맨이 미리 내다 보고 있었던 것 같다. 꼰대가 스피커를 잡고 매체가 책임감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그래서 이전 블로그인 이글루스에서도 대통령 욕은 숱하게 해도 꼰대와 관련된 글은 거의 쓰질 않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글은 이전 블로그에서 꼰대라 불렀던 인간에 관한 이야기다. 그렇다. 한번 꼰대는 영원한 꼰대인가보다.
꼰대에 대한 이미지를 들어보자. 뭐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자기중심적인데다가 타인에게 도와주지도 않을거면서 이래라 저래라 하며 자기 좋을 부분만 내세우며, 자기만의 가치관과 기준을 타인에게 강요한다는 점, 솔선수범도 못 하는 주제에 말의 앞뒤가 안 맞는 자가당착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 등이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사회에서 딱히 만나고 싶지 않은 부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런 꼰대를 인터넷에서는 쉽게 볼 수 있다. 참으로 잔인한 세상이다. 자기 가족이 아닌 이상 꼰대는 동네에서도 일주일에 한번 만날까 말까 하지만 인터넷에서는 쉽게 볼 수 있게 된다.
"저도 14살 때 매우 멍청했어요. 제가 14살 땐 트위터도 페이스북도 없었죠. 그러니까 전 멍청했지만 은밀하게 멍청했었던 겁니다."
과거에는 멍청한 짓거리도 한두번 볼까 말까 한 꼰대도 지금 시대에서는 매우 쉽게 볼 수 있다. 이 시대에서는 은밀하게 멍청한 짓거리나 꼰대 짓거리를 하려고 하지 않으니까.
꼰대의 가장 큰 문제점은 자기가 옳다고 믿는다는 점이다. 자신이 틀릴수도 있다는 점을 절대 인정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건드리면 건드릴 수록 더욱 시끄러워진다. 그나마 동네 꼰대라면 다들 쉬쉬 하며 저 인간 병신이야 라며 냅둬 버리겠지만, 온라인에서는 그렇지 않다. 꼰대를 공격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고, 대응하다 지쳐 쓰러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새로 투입되는 전투요원들도 생기기에 온라인은 계속 뜨거워질수가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점은 꼰대는 그나마 귀엽게 표현해서 꼰대라고 하는 것이지 엄밀히 말하면 사회 부적응자에 가깝다는 점이다.
본래 사람은 원만한 관계를 위해서 적당히 맞춰 주고 넘어가려고 하는 편이다. 마찰이 적을 수록 자신에게 돌아오는 위험이 적고, 그렇게 안전하게 살아가는 편이 생존에도 도움이 되고, 사회를 유지하는데 이점이 되어 원만한 사회는 원만한 안전을 이끌어 내기 마련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꼰대는 그렇지 못 하다. 꼰대는 적당히 맞춰주고 넘어가고 그런게 없다. 다 자기 위주다. 처세술이 개판이라 누굴 맞춰주는 것도 못 하고 오히려 맞춰주길 바란다. 말로는 장유유서니 하며 삼강오륜을 읊지만 말과 행동이 따로 논다. 신뢰도도 바닥이다. 눈치도 없어서 싫어하는 사람에게 싫어하는 걸 디민다. 자기가 나이가 많다는 점을 이용해서나이가 어린 사람에게 무례하게 대하며 어리다고 무식할거라 생각하여 자기가 알고 있는 틀린 정보를 강요하고 고치려고 하면 대놓고 무시한다. 도와 줄 것도 아니면서 오지랖이 심하다. 상대가 기뻐 할 일이 생겨도 찬물 끼얹듯 쿨병 걸린 척 폄하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살고 고치지도 못 하다 보니 주변에서는 배척을 당한다.
완벽한 사회 부적응자의 표본이다.
문제는 그 사회 부적응자가 적당한 위치를 지녔을 때의 문제다. 그렇다. 그 온라인에서 활발하게 타오르는 장작의 주범인 자칭 음식 평론가 이야기다.
난 이전에 그 사람이 혼밥을 사회적 자폐라고 한 것에 대해서 반론하는 글을 쓴 적이 있었는데, 사실 그냥 지나가던 글쓴이가 인터넷에서 덧글을 적은 정도로는 굳이 반론을 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뭐지? 저 병신은? 정도로 치부하거나 그 덧글에 답글로 싸웠겠지.
하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단순한 지나가던 병신이 아닌 적당한 위치를 지닌 병신이었기에 충분히 다수의 공분을 사고 공격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단순히 덧글란에서 치고 박는 난장판이 아닌 그가 떠벌이고 다니는 것을 담는 매체마다 난장판이 되고 만다. 일개 덧글러의 덧글을 뉴스 매체가 다룰 일이 없듯이 그가 가진 사회적 위치를 제대로 추스리지 못 한 자의 결말은 논란만 불러 일으키고 좋은 이미지를 쌓지 못 하여 결국 그 사회적 위치마저 무너지고 마는 것일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그 위치에 올려 놓은 것도 매체이고, 그를 떨어 뜨리는 것도 매체이다. 만약 매체들이 그의 개소리를 흔한 덧글러의 헛소리로 치부해서 다루지 않았다면 아마도 대중들의 관심을 크게 받지는 못 하였겠지만, 매체들이 그의 이야기를 다루어 적당한 위치를 주었던 것 처럼 마찬가지로 그의 헛소리를 매체들이 다룸으로서 다시 끌어내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이 과정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 대중들이 관여 할 수 있는 점이 극히 적다는 점이다.
매체의 영향력이 큰 반면 그 매체들의 자기검열과 자정작용은 그리 대단하지 않다. 적절한 기준에도 못 미치고 자격도 없는 사람들에게 매체는 쉽사리 이미지와 위치를 만들어 준다. 그리고 이슈에 따라 부풀리고 관심을 받으려는 것이 전부다. 그래서 면피용 문구도 이렇지 않은가. 출연자의 의견은 방송의 입장과 다릅니다 라고 말이다. 그 출연자를 데려와서 메세지를 전달시킨 것은 매체임에도 그들은 전혀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는다.
이는 우리가 앞으로도 숱하게 봐야 할 상황임을 암시하고 있다. 어설픈 사람을 매체에 출현 시키고 그의 말을 띄워 주었는데 그가 꼰대임이 밝혀지고 나면 대중들은 그 꼰대와 싸우지만 정작 그 꼰대에게 위치를 부여한 매체는 나몰라라 한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시청률 하락이거나 대중들의 외면으로 돌아오겠지만 그러한 것도 출연자 교체로 메꾸면 무리가 없다.
사회 부적응자인 꼰대의 개소리와 책임감 없는 매체의 일방적인 메세지 전달 사이에서 대중들은 자연스레 피곤 해 질 수 밖에 없다. 오프라인 꼰대처럼 그냥 무시하고 안 보고 안 들으면 그만이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온라인 꼰대에게 불이 붙어 달려드는 사람들이 있는 한 논란이 빠르게 수그러들긴 매우 어렵다. 결국 스스로 매체와 꼰대를 주의하여 거리를 두는 수 밖에 없다.
세상이 발전하여 거리에 상관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의견을 낼 수 있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 거리에 상관없이 다양한 꼰대들이 일방적인 메세지를 강요하게 된 것은 웃긴 일이다.
그나마 스파이더맨에서 JJJ 이 양반의 뚜렷한 캐릭터성은 자신의 신념과 맞지 않으면 설령 이전까지 지지했더라도 바로 철회하고 적으로 돌릴 수 있다는 점인데, 온라인 꼰대들에겐 그런 캐릭터성 조차 없다는 점이 참으로 안타깝다.
어떻게 보면 스파이더맨이 미리 내다 보고 있었던 것 같다. 꼰대가 스피커를 잡고 매체가 책임감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서양쪽의 동양인 취향은 이쪽인가
페니 파커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라고 하는 극장판 애니메이션에 나올 예정이라는데, 기존의 미국식 그림체에서 벗어나 좀 더 카툰스러운 느낌이다.
원래 엣지 오브 스파이더버스에서 첫 등장한 페니 파커는 극화체+에바라는 평가가 있었는데 이렇게 변경한 것을 보면 이쪽이 좀 더 노멀하게 먹혀 들어간다고 느낀것일듯.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빅히어로의 히로 아르마다와 유사한 느낌을 받는 것은 왜일까?
좀 더 다양한 사례가 있다면 선호하는 특징을 간추릴 수 있겠지만 아직은 그다지 메인이거나 특출하게 동양인을 써먹는 케이스가 적다보니 뭐라 못 하겠네.
2018년 10월 21일 일요일
몬월 스샷
아이루 귀여워
아이루 찍으려고 사진 찍었는데 정작 포인트는 등짝에 있었네
이전까지 몬헌 플레이어 캐릭터는 잘 쳐 줘 봤자 원시인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었는데 이렇게 좋아진 그래픽과 모션들을 보니까 좋다
이전까지 몬헌에서 내 주력 무기는 대검 아니면 태도였는데, 푸르푸르 한정 랜스나 바사루모스,디아볼로스 한정 보우건 등이었고. 해머는 게료스 잡을때 아니면 안 썼는데
몬헌 월드에서 내 주력 무기는 어쩐지 해머가 되어 버렸다.
안자냐프가 까다로울거 같아서 랜스로 잡긴 했지만 정작 다시 만났을 때 해머로 때려 잡는게 훨씬 편했고, 디아볼로스도 보우건 관통탄으로 딜 다 때려 부었지만 정작 잡기 전 아슬아슬할때 3수레 타서 실패한 걸 해머 들고 가니까 1수레 타고 클리어. 어째서인지 다른 무기로 잘 잡던 녀석들을 몬헌 월드에선 다 해머로 때려잡고 있다.
싫지는 않은데 해머 단점이 절단을 못 한다는 거라서. 꼬리치기 패턴 같은거 끊는게 안 된다는 점이 아쉽다. 그래서 아이루한테는 절단 무기 주고 있지만 절단은 커녕....
해머가 딜은 잘 나와서 똑같은 시간 걸려서 수레 탈거 더 빨리 죽이니까 덜 탄다는 정도일까.
마그다라오스 유인까지 끝내고 마이하우스 처음으로 찾아 들어가서 보니까 특등급으로 격상하고, 아주 호사를 누리게 되었는데 마침 여기서 무기연습을 처음으로 해 봤다.
랜스나 건랜스, 태도는 뭐 좀 숙련되면 할만하겠네 싶었는데 차지액스, 슬래시액스는 이 무슨.... 그래도 그 둘 중 하나는 말뚝콤보라도 있으니 다행인데 다른 하나는 너무 복잡했다.
조충곤도 마찬가지. 다단히트라 부파에 써먹긴 좋아 보이는데 버프를 충족시켜야 한다니 너무 복잡하다. 최소한 귀인게이지니 포격용탄이니 하는 거는 모아서 필요 할 때 쓴다는 개념이라 크게 이상할건 없는데, 슬액인지 차액인지는 병을 충전하고 가드 게이지도 모아야 하고, 조충곤은 곤충 날려서 수액 모아서 버프를 발동시켜야 하고, 마찬가지의 이유로 나는 수렵피리도 못 쓴다. 너무 복잡해서.
캡콤의 단점은 액션 게임을 너무 복잡하게 끌어가려고 한다는 것이다. 스트리트 파이터도 넘버링이 올라갈수록 너무 공방의 개념을 복잡하게 만드는데 그래서 내가 KOF는 해도 스파는 안 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아직은 해머로 뽕 뽑으니까 하긴 하지만 무기를 갈아타야 할 시점이 오면 좀 모르겠네. 특히 고룡종은... 고룡종은 이번에 뭐 용봉력인가로 바뀌어서 그놈의 풍압이나 화염같은거 둘둘 두르고 오면 빡칠텐데. 예전에 2ndG에서 그거 깨느라 짜증나서 건드리기도 싫었던게 걔네들이었건만.
2018년 10월 20일 토요일
지금 이 정부 기조가 이거였구나
미리 언론으로 어떤 대상에 대해 안 좋은 면을 부각한다. 비리라던가 불법이라던가 외설적이라던가 건강에 유해하다던가 등 끄집어 낼 수 있는 안 좋은 면을 끄집어 낸다.
그리고 사람들의 분노가 올라가고, 청원이 들쑤셔지고 사람들 관심은 나쁜놈 때려잡기, 세상 올바르게 하기 이쪽으로 관심이 쏠리지만
사실상 들쑤셔 놓은 곳의 진짜 문제점은 정부에게 있고 그걸 드러내면 지지율 떨어져서 안 되니까 희생양을 찾아서 덮어씌워 버리는 짓
하지만 한국은 너무 좁아서 이 짓을 자주 써 먹다가는 한두명 건너 실상이 다 드러나 버릴텐데?
아 그래서 이 정부가 꼴페미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는구나. 어차피 걔네들은 일 안 하니까 누가 희생양이 되더라도 자기는 아닐거라 생각하고 나만 아니면 되지 뭐 이 생각일거고 걍 일 안 하고 태평하게 세상을 이분법으로 바라보며 언제든 표 줄 수 있는 애들이니까
전 정권은 멍청한 애 한명에게 권력을 주다가 망했지만, 이번 정권은 멍청한 애 다수에게 권력을 빌붙다가 망하려나?
그리고 사람들의 분노가 올라가고, 청원이 들쑤셔지고 사람들 관심은 나쁜놈 때려잡기, 세상 올바르게 하기 이쪽으로 관심이 쏠리지만
사실상 들쑤셔 놓은 곳의 진짜 문제점은 정부에게 있고 그걸 드러내면 지지율 떨어져서 안 되니까 희생양을 찾아서 덮어씌워 버리는 짓
하지만 한국은 너무 좁아서 이 짓을 자주 써 먹다가는 한두명 건너 실상이 다 드러나 버릴텐데?
아 그래서 이 정부가 꼴페미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는구나. 어차피 걔네들은 일 안 하니까 누가 희생양이 되더라도 자기는 아닐거라 생각하고 나만 아니면 되지 뭐 이 생각일거고 걍 일 안 하고 태평하게 세상을 이분법으로 바라보며 언제든 표 줄 수 있는 애들이니까
전 정권은 멍청한 애 한명에게 권력을 주다가 망했지만, 이번 정권은 멍청한 애 다수에게 권력을 빌붙다가 망하려나?
민주당 살기 편해지니까 또 개소리 지껄이는구나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4&oid=016&aid=0001453858
호기심으로 살인사건 신경쓴다고? 사람이 죽었는데 호기심 때문에 기웃거리는거 같냐?
아니 그러면 화전동 송유관 화재도 호기심이고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돌아오길 원하던 세월호때 뉴스들도 다 호기심 때문에 그랬겠다? 일이 더 커지지 않길 바라며 더 이상 큰 피해가 없길 바라는거지.
하여간 저렇게 수준 낮은 새끼들은 꼭 다른 사람들까지 같은 수준으로 바라봐요. 너만 그런거야. 너만.
호기심으로 살인사건 신경쓴다고? 사람이 죽었는데 호기심 때문에 기웃거리는거 같냐?
아니 그러면 화전동 송유관 화재도 호기심이고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돌아오길 원하던 세월호때 뉴스들도 다 호기심 때문에 그랬겠다? 일이 더 커지지 않길 바라며 더 이상 큰 피해가 없길 바라는거지.
하여간 저렇게 수준 낮은 새끼들은 꼭 다른 사람들까지 같은 수준으로 바라봐요. 너만 그런거야. 너만.
2018년 10월 19일 금요일
최근에 건드렸던 요리 소스 이야기
파운틴 핫칠리 소스 -
요 전에 한솥 도시락에서 깐쇼 칠리 새우를 먹었었는데 그 칠리소스가 보통의 스위트 칠리보다는 좀 더 매콤하고 입에 감기는 맛이어서 인상 깊었다. 그런데 그 소스를 마트에서 비슷한거라도 찾아 보고 싶었는데 영 죄다 스위트칠리였다.
그런데 이 파운틴 핫칠리는 좀 비슷하게 많이 매콤하다. 다만 그 깐쇼칠리보다는 맛이 다른 점은 단맛이 덜하다는거라서 비슷하게 맛을 내려면 살짝 열을 가해주거나, 설탕을 좀 넣으면 될듯. 이 칠리소스도 열을 가하면 매운맛이 많이 사라진다.
이금기 중화 XO 소스 매운맛 -
이게 그 재료의 해산물 특유의 비린내랄까 쿰쿰한 향이 강하다. 맛은.... 그다지. 비싼 값을 못 한다. 맛있어서 비싼게 아니라 들어간 재료가 비싸서 비싼것일 뿐.
애초에 이 소스가 활약 할 수 있는 요리가 일반인의 요리와는 거리가 멀다. 그냥 볶음밥 해 먹으면 내가 이러려고 그 비싼 값을 치뤘나 싶을 정도.
정말로 궁금하겠지만 굳이 사서 해 먹을 정도까지는 아니다. 얼마나 별로냐면
차라리 굴소스나 고추마늘소스가 더 나을것이고, 심지어 케찹에 밥을 볶아도 이 정도로 허무하진 않을거라는 것.
이금기 중화고추마늘 소스 -
제육볶음용으로는 매우 좋다. 처음 이걸로 돼지고기랑 같이 구워서 먹었을 때는 뭐지. 뭐가 이렇게 땡기지 싶을 정도로 계속 찾게 되었다. 그런데 두번째, 세번째 구웠을 때는 양을 좀 못 맞췄는지 그렇게까지 땡기지가 않았는데, 참 미묘한 조미료다. 그 황금의 밸런스만 찾아 낼 수 있다면 좋을텐데.
문제는 이 소스가 내가 주로 가는 매장에서 자취를 감춰 버렸다. 지금은 두반장하고 마파두부 소스만 있는데, 이게 두반장하곤 좀 다른 맛이란 말이지. 아무래도 지금 먹고 있는 소스를 다 먹으면 근처 지하철역 마트쪽을 찾아 봐야 할 듯.
요리하다 씨푸드 칵테일 소스 -
겉표시 부분에는 뭐 케찹이니 핫소스니 타바스코페퍼소스니 매운맛으로 무장한거 마냥 으름장을 놓는데
다 헛소리다. 저 위 파운틴 핫칠리소스만큼도 안 맵다. 아니 맵다 안 맵다 이전에 케찹도 핫소스도 그런 느낌이 없다. 오히려 들어간 재료 중에 우스타 소스가 있는데, 이 우스트 소스의 향과 맛이 더 강하다.
아무리 우스타 소스가 거진 만능에 가깝게 좋긴 하나, 이 소스는 우스타 소스가 전부 다 씹어먹어서 기대와는 전혀 다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나는 우스터 소스 자체는 좋아하니까 이걸 볶음밥에 한번 써 먹어 보고, 정 아니면 좀 용도를 써 먹게 머리를 굴려 봐야지. 일단 아직 볶음에 써 먹지 않았으니 나중에 더 활용 해 보고 내용 추가 할 예정.
p.s 역시 그나마 볶아 먹는데 쓰는게 낫다. 우스터 소스 맛이 강해서 칵테일 소스는 모르겠고, 아무튼 이쪽이 그나마..
요 전에 한솥 도시락에서 깐쇼 칠리 새우를 먹었었는데 그 칠리소스가 보통의 스위트 칠리보다는 좀 더 매콤하고 입에 감기는 맛이어서 인상 깊었다. 그런데 그 소스를 마트에서 비슷한거라도 찾아 보고 싶었는데 영 죄다 스위트칠리였다.
그런데 이 파운틴 핫칠리는 좀 비슷하게 많이 매콤하다. 다만 그 깐쇼칠리보다는 맛이 다른 점은 단맛이 덜하다는거라서 비슷하게 맛을 내려면 살짝 열을 가해주거나, 설탕을 좀 넣으면 될듯. 이 칠리소스도 열을 가하면 매운맛이 많이 사라진다.
이금기 중화 XO 소스 매운맛 -
이게 그 재료의 해산물 특유의 비린내랄까 쿰쿰한 향이 강하다. 맛은.... 그다지. 비싼 값을 못 한다. 맛있어서 비싼게 아니라 들어간 재료가 비싸서 비싼것일 뿐.
애초에 이 소스가 활약 할 수 있는 요리가 일반인의 요리와는 거리가 멀다. 그냥 볶음밥 해 먹으면 내가 이러려고 그 비싼 값을 치뤘나 싶을 정도.
정말로 궁금하겠지만 굳이 사서 해 먹을 정도까지는 아니다. 얼마나 별로냐면
차라리 굴소스나 고추마늘소스가 더 나을것이고, 심지어 케찹에 밥을 볶아도 이 정도로 허무하진 않을거라는 것.
이금기 중화고추마늘 소스 -
제육볶음용으로는 매우 좋다. 처음 이걸로 돼지고기랑 같이 구워서 먹었을 때는 뭐지. 뭐가 이렇게 땡기지 싶을 정도로 계속 찾게 되었다. 그런데 두번째, 세번째 구웠을 때는 양을 좀 못 맞췄는지 그렇게까지 땡기지가 않았는데, 참 미묘한 조미료다. 그 황금의 밸런스만 찾아 낼 수 있다면 좋을텐데.
문제는 이 소스가 내가 주로 가는 매장에서 자취를 감춰 버렸다. 지금은 두반장하고 마파두부 소스만 있는데, 이게 두반장하곤 좀 다른 맛이란 말이지. 아무래도 지금 먹고 있는 소스를 다 먹으면 근처 지하철역 마트쪽을 찾아 봐야 할 듯.
요리하다 씨푸드 칵테일 소스 -
겉표시 부분에는 뭐 케찹이니 핫소스니 타바스코페퍼소스니 매운맛으로 무장한거 마냥 으름장을 놓는데
다 헛소리다. 저 위 파운틴 핫칠리소스만큼도 안 맵다. 아니 맵다 안 맵다 이전에 케찹도 핫소스도 그런 느낌이 없다. 오히려 들어간 재료 중에 우스타 소스가 있는데, 이 우스트 소스의 향과 맛이 더 강하다.
아무리 우스타 소스가 거진 만능에 가깝게 좋긴 하나, 이 소스는 우스타 소스가 전부 다 씹어먹어서 기대와는 전혀 다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나는 우스터 소스 자체는 좋아하니까 이걸 볶음밥에 한번 써 먹어 보고, 정 아니면 좀 용도를 써 먹게 머리를 굴려 봐야지. 일단 아직 볶음에 써 먹지 않았으니 나중에 더 활용 해 보고 내용 추가 할 예정.
p.s 역시 그나마 볶아 먹는데 쓰는게 낫다. 우스터 소스 맛이 강해서 칵테일 소스는 모르겠고, 아무튼 이쪽이 그나마..
캐치온,애니플러스 한일동시방영관 되게 어이없네
케이블 TV 요금내역 받아 봤는데 캐치온 월정액 VOD요금은 그렇다 쳐도, 캐치온 유료채널도 같이 찍혀서 나오네. 어이없네.
왜냐하면 캐치온 VOD 월정액 가입하고 해지 할 때 까지 단 한번도 이 유료채널이 제대로 나온 적이 없었으니까. 나오지도 않는데 뭐 어쩌라는건데
근데 요금은 통합으로 뽑아가기나 하고 말이지. 완전 뭐같네. Dlive 고객센터에 왜 그런지 물어 보니까 그건 따로 문의를 해야 하는거라고 말 돌려서 지들끼리 폭탄돌리기 하고 싶은거 같아서 그냥 짜증나서 패스했다. 서로 책임떠넘기기 하면 시간만 잡아먹고 한도 끝도 없으니까.
애니플러스도 마찬가지. TV에서는 고블린 슬레이어랑 전생 슬라임이었던건을 방영하면서 정작 한일동시방영관 VOD에는 추가하질 않는데다가, 도서관 혼다는 코믹인데 무슨 액션 모험쪽에다 집어넣질 않나. 그럴거면 분류는 뭐하러 하냐. 예전처럼 그냥 한데 다 묶어버리지. 거기다가 공홈 검색기능은 아예 아무런 기능이 없고.
한일동시방영이 한일동시방영하지 않는데 뭐하러 보겠냐고. 니들 그거 VOD로 다 올라오기 전까지는 그냥 끊을란다.
왜냐하면 캐치온 VOD 월정액 가입하고 해지 할 때 까지 단 한번도 이 유료채널이 제대로 나온 적이 없었으니까. 나오지도 않는데 뭐 어쩌라는건데
근데 요금은 통합으로 뽑아가기나 하고 말이지. 완전 뭐같네. Dlive 고객센터에 왜 그런지 물어 보니까 그건 따로 문의를 해야 하는거라고 말 돌려서 지들끼리 폭탄돌리기 하고 싶은거 같아서 그냥 짜증나서 패스했다. 서로 책임떠넘기기 하면 시간만 잡아먹고 한도 끝도 없으니까.
애니플러스도 마찬가지. TV에서는 고블린 슬레이어랑 전생 슬라임이었던건을 방영하면서 정작 한일동시방영관 VOD에는 추가하질 않는데다가, 도서관 혼다는 코믹인데 무슨 액션 모험쪽에다 집어넣질 않나. 그럴거면 분류는 뭐하러 하냐. 예전처럼 그냥 한데 다 묶어버리지. 거기다가 공홈 검색기능은 아예 아무런 기능이 없고.
한일동시방영이 한일동시방영하지 않는데 뭐하러 보겠냐고. 니들 그거 VOD로 다 올라오기 전까지는 그냥 끊을란다.
2018년 10월 18일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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